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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Oct 11. 2024

추수날, 마치 직접 논농사 지은 듯

벼농사를 짓는 하논은 가깝기도 하지만 고향같이 정스러워 수시로 들랑거렸다.

사라져 가는 농촌 풍경을 보여주는 하논이라 계절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철철이 드나들었다.

자꾸 오다 보니 땅과 정분이라도 난 걸까, 아니면 하논마르가 내 농사터라도 되는 듯 여겨졌던가.

하논에 오면 물색없이 괜스레 미소가 번진다.

제주도내에서도 오직 벼농사는 하논에서 뿐, 이렇듯 특별하니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든다.

묵직이 고개 숙인 벼 이삭 익게 한 농부라도 되는 양 논을 바라볼수록 대견스럽고 뿌듯해진다.

수심 깊은 최참판댁 마나님이야 드넓은 내 토지인 평사리 들녘 내려다면서도 시름에 젖었을 터.

허나 어디에도 걸림없이 만고 편하게 사는 내사, 풍요로운 남의 논 풍작도 내일인 듯 괜스레 기꺼워 입이 벙글어진다.


한 이틀 꾸물대던 날씨가 반짝 들어 화창해진 정오 무렵, 자연스레 발길은 하논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슬이건 빗물이건 물기 마른 다음에 벼를 벨 테니 어쩌면 운 좋게 추수하는 광경을 접할 수도 있겠다 싶긴 했다.

옳다구나! 들길 모퉁이를 돌자 낯선 기계음이 들렸다.

논 한가운데 콤바인이 보였고 어느새 수확해 놓은 벼 포대가 군데군데 쌓여있었다.

날쌘 걸음으로 논두렁 따라 한창 작업 중인 논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부창부수 손발 척척 맞는 부부 농부 중 남정네는 콤바인을 몰고, 아낙은 볏짚과 분리돼 나오는 나락을 포대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눈 돌릴 새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계속되는 작업, 마치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새 상품이 출시돼 나오는 것 같았다.

둔중한 몸체인 콤바인은 매끄러이 코너를 돌 수가 없어 뒷걸음질도 쳤고 그 통에 더러는 옆으로 깔리고 마는 벼포기도 있었다.  

캐터필러 닮은 바퀴가 돌면서 전진, 후진 자재로이 하며 삽시간에 술술 홀려드는 양 흡입구로 빨려 들어가는 볏단.

줄줄이 한입 욱여넣은 벼포기는 나락만 따로 탈곡시켜 중간 장치로 빠지고, 달리는 말 배설하듯 볏짚 주르륵 뽑아내며 내닫는다.

일일이 낫질해 벼를 벤 다음 묶은 볏단 바짝 말려서, 와릉다릉 탈곡기로 알곡 털어내려면 얼마나 일손 번거로웠던가.

진종일 해야 할 일을 단시간에 해결해 주는 편리한 기계 덕에 농사일이 전만큼 고되지는 않을 듯.

그들이 잠시 쉴 짬을 기다리며 구름 덮인 한라산 쳐다보기도 하고 볏짚 깔린 논바닥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역시 기계로 하는 일이라 낫으로 벼를 베는 것보다 허실이 많아 멀쩡한 벼 이삭들이 떨어진 채 흔히 눈에 띄었다.

이삭 줍기 하던 예전 같으면 제법 짭짤한 소득이 될 만한 분량이었다.


논바닥을 살피던 중, 얼마 전 농수로에서 보았던 분홍색 우렁이 알이 촘촘 붙은 볏짚 도처에서 만났다.

용천수 퐁퐁 샘솟는 땅에 자운영 퇴비 삼은 데다 우렁이 번성하는 논이라면 최상질의 미곡 산지인 셈.

기계 소리가 멎기에 농기계 쪽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진작에 안면 튼 그들 부부라 서로 인사를 나눴다.

두 분이 최고로 잘 맞는 협동 작업을 하시네요, 했더니 이십 년 넘어 죽 이렇게 농사지으며 살았는걸요.

그러면서 덧붙이길, 이 일 하며 애들 키워 학교 보내고 결혼시켜 지금은 죄다 나가 살아요.

짚 먼지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아낙이 둥둥 싸매 겨우 눈만 보이며 자긍 어린 어조로 하는 말이다.  

아저씨는 탱크도 몰 수 있겠어요, 하자 오토바이만 탈 줄 알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우직 소박하고 소탈한 농심에서 나오는 답은 이리 겸손하다.

농사일에 전념하면서도 그간 내 하는 양 눈여겨보았던가, 고등학생처럼 뭘 그리 열심히 찍으시나요? 묻는다.

논바닥 헤집고 다니며 사진에 담는 사람에게 찰스 다윈이나 곤충학자 파블로라도 떠올렸나. ㅎ

뭐든 놀잇감 만들어 즐거이 몰두하는 싱거운 짓거리조차 이처럼 보기 나름 생각하기 나름이렷다.

이 농사처는 우렁이가 사는 논이잖아요, 그러니 품질 믿을만해서 부탁인데 저한테 쌀 좀 파세요.

도정해서 일괄 구매처로 보내지만 적은 양이니 그렇게 하마고 농부 내외는 약속했다.

전화번호를 받고는 이미 쌀가마 들여다 쟁여놓은 듯 마음 부품 해져서 2차 행선지인 '생각하는 공원'으로 신바람나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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