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Oct 14. 2024

새별오름에 억새 은빛 물결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어...

애국가 가사 그대로인 청명한 날씨다.

맑고 넓게 펼쳐진 하늘은 푸르디푸르다.

이럴 땐 집에 머물러 있다 해도 푸른 하늘이 외출을 부추겨대기 마련.

하물며 오전 일을 마친 다음에랴.

곱게 집으로 들어갈 리가 없다.

마침 갈바람도 불어 제키겠다 바람 쐬러 오라고 유혹해 대는 그곳.

새별오름이 손짓하고 있지 않은가.

역시 가을은 하얗게 나부끼는 갈대 혹은 억새의 계절.

억새, 하면 제주에서는 단연 새별오름이다.

까까머리 민둥산 같아 보이지만 동쪽 산기슭과 아랫녘 발치 따라 드넓게 억새가 군락 이뤄 탄성 자아내게 한다.

일단 규모로 선기를 제압하고 위풍당당 거칠 게 없다.

그렇게 더없이 부드러운 춤사위로 일사불란하게 펼치는 카드 섹션의 장관이야말로 으뜸가는 명품이다.

억새 무리 져 바람 따라 은물결 너울거리는 춤은 숫제 무아경에 빠진 영혼의 몸짓에 다름 아니다.

이쪽저쪽으로 자유로이 출렁출렁, 바람 불어오는 대로 저항없이 몸을 맡긴 해탈의 경지를 본다.

매양 그러하듯 광장에서 우측으로 길머리를 잡는다.

초입부터 키대로 자란 군락지 억새가 숱 많은 머릿단처럼 풍성하기도 하다.

감탄사 연발, 사진 찍기도 좋거니와 은파에 하냥 취한 채 가을 서정시인이 되게끔 이끈다.

양편에 억새 파도 거느리고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 언덕길 오르다가 잠깐씩 멈춰 심호흡하면서 돌아보면 서로 다른 사방 풍광.

오후 양광 아래 눈부신 억새숲은 차라리 흠씬 서리 내린 숲 같이 하이얗다.

끝 모르게 능선 엎드려 있는 태백산 겨울등반 때 본 은색 설원과도 닮았고.

시선 돌리면 동남으로는 촛대오름 이달봉 금오름 돌오름, 서북쪽엔 무게중심 잘 잡은 한라산 웅자가 두상만 드러내도 확연히 눈에 띈다.

남쪽으론 푸르게 펼쳐놓은 초장에 동경처럼 번쩍대는 바다, 북으로는 골프리조트가 그림처럼 앉아있고 노꼬매오름이 멀찌감치 솟아있다.

이처럼 새별오름의 버금 명소는 산길 오르며 둘러보는 각양각색의 전망들.

더불어 흉금 시원하게 터지는 산정 정상석에서의 훌륭한 조망권은 단연 압권.

저만치에 제주시내 아른거리고 바다 짙푸르게 깔려있으며 발치 가까이 골프장이며 이시돌목장 초록 잔디 그림 같다.

백록담이 또렷이 보이는가 하면 울멍줄멍 오름들 전후좌우 시립하고 서있는 이 모든 경관 자체가 명품이다.

효성악(曉星岳). 신성악(晨星岳. 新星岳). 조비악(鳥飛岳)으로도 불리는 새별오름.

초저녁에 뜨는 샛별인 효성, 금성에서 따온 이름마저 고운 새별오름이다.

중산간 오름 중에서 으뜸가는 서부의 대표 오름으로 해발 519.3m, 높이 119m이나 평지에 서 있다 보니 우뚝하다.

사철 관광객이 줄을 잇지만 특히 억새 철이 되면 하얗게 물결치는 은파 보려고 뭇 인파 몰려드는 억새 명소다.

아침나절 일찌감치 나서서 새별오름에 도착하니 여덟 시도 안 됐다.

효성은 만나지 못했지만 푸른 창천에 서녘으로 지는 달이 높다라니 떠있었다.

요 며칠 내내 날씨가 좋았는데 오늘은 더욱 쾌청, 구름 한점 띄우지 않은 짙푸른 감벽이 지중해 물빛이다.

억새 군락지 다이 마악 무르익어가는 억새꽃 무리가 아주 장관을 이뤘다.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우측 부드러운 능선길도 처음은 가파르나 별로 부담스럽진 않다.

산정에 오르는 동안 쉬엄쉬엄 경치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속이 탁 트이는 정상, 서쪽에 펼쳐진 해변들과 비양도가 보인다.

북동쪽으로 위엄찬 한라산, 군림하듯 여러 오름 거느렸지만 두루 보듬어 아우른 품새 넉넉하다.


억새는 여리게 나부끼는 꽃만 보면 한없이 유해 보이지만 이름자 느낌대로 성정이 억세고 거칠다.

어린 풀일 때를 제외하곤 잎과 줄기가 몹시 강퍅진데다 벼린 듯 날을 세웠다.

하여 자칫 잎이라도 잡았다간 스윽~손가락 베이기 십상이다.

초가을에서 만추까지 윤슬 하얗게 반짝이듯, 설원에 눈바람 회오리 일듯 하며 새별오름은 전성기를 맞는다.

허나 정월 대보름날 들불축제가 열리며 산 전체는 불길에 휩싸인다.

그리 핍박당해도, 봄이면 억새풀 파릇파릇 되살아나며 모진 생명력을 보여준다.

아무리 척박한 황무지 민둥산일지라도 악착같이 흙을 부여잡고 뿌리 뻗어 영토 넓혀 나가는 억새다.

그 억척으로 저리도 무성한 억새밭을 이룬 데야 성원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고려 말 반란군이 일으킨 목호의 난 당시 최영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목호 세력을 토벌한 주요 전쟁터였다는 이곳.

4·3 때는 남로당 무장대 거점의 하나로 여기서 군사 훈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고.

지금 같아선, 산채라도 짓고 군대 은거할 만한 후미진 골 도통 없는 데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오름이라 쉬 납득가지 않지만.

하긴 어쩌면 그 난리통에 온 산이 벌거숭이로 변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질곡의 수난사 점철된 제주 곳곳 어딘들 아픈 생채기 남겨지지 않은 데 있을까마는.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에 위치한 새별오름은 잘 알다시피 가을억새와 정월대보름 무렵의 들불축제로 이름난 곳이다.

가을철에 억새 보러 한두 번 와본 이들은 경사 완만한 오른편 능선길을 택해 오른다.

희한하게 관광객 대부분은 왼쪽으로 들 올라가나 그 길은 경사가 가팔라 초장부터 힘을 소진시키는 난코스.

단체팀일수록 어려운 길을 택하는데 일부러 체력훈련 겸 인내심 키우려 강행군을 시키는지도.

새별오름에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 천지다.

여고생들은 힘겹다고 투정 부리면서도 처지지 않고 꾸역꾸역 언덕길 잘도 오른다.

저마다 떠들며 수다 피는데도 그 소음이 재잘거리는 새소리처럼 청량하게 들린다.

애들 때는 모르지만 이 시절만큼 좋은 시기가 살면서 과연 몇 번이나 오는가.

대입 준비하기 너무 힘들어 스트레스라 하나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보장되는 시험공부야말로 전력투구해 볼 만한 일.

바르게 멋지게 사는 지름길이 열려있는 학창 시절과 같은 기회는 평생에 단 한 번 허락된다는 걸 청소년들은 알는지.

얼마나 소중한 시기인지를 일찍 깨우쳤다면 외모에나 신경 쓰며 치마 길이 아슬아슬하게 끌어올리진 않으련만.

경사 급한 산길 오르는 여학생의 뒤태를 보며 여러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굳이 가꾸지 않아도 맨얼굴 그대로 오월 숲처럼 싱그러우며 차림새 단정만 해도 샛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시기가 십 대.

그 걸, 새하얀 억새꽃 피는 시기 이전 애진작에 알았다면 분명 우리네 삶의 양태 달라질 텐데.


하긴 그 나이에 무얼 알랴, 돌이켜 보니 삼십 而立 훌쩍 지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 지나도 사리분별은커녕 철이 들려면 지천명에도 어림없었으니....


작가의 이전글 건강 황톳길 걸어봐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