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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무량화
Oct 15. 2024
제주 여객터미널 건넛마을
제주 여객터미널 맞은편.
아하! 당연히 그럴법하다.
지금처럼 항공기가 오분 상관으로 뜨고 내리는 세월이 아닌 조선 후기
다.
육지와의 연결은 오직
배 편 뿐이던 시절.
가장 빈번하게 왕래가 오가는 곳, 사람들이 많이 모이므로 가장 번성한 마을이었을 터다.
건입포에 들어선 건입동 설촌 유래가 저절로 이해되고도 남는다.
제주섬에서 뭍으로 오가는 관문이었던 건입포는 교역과 어로활동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 남정네들은 봄이면 배를 타고 연평도 해주 신의주까지 나가서 어로작업도 하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음력 시월 들어서야 돛대에 바람을 가득 담고서 쌀과 각종 생필품들을 사가지고 돌아와 제주에 풀었다.
조선시대 제주도의 관문이었던 건입동이다.
이 포구에서 수많은 물자가 유통됐고 따라서 상품을 중계하는 객주들이 들어섰다.
기녀 출신에서 양민으로 돌아온 김만덕의 객주도 그중 하나였다.
거상으로 다시 자선사업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김만덕 할망.
제주도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그녀는 전 재산을 털어 쌀 500석을 사서 도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눔과 베풂을 실천해 이 땅의 대표적 의인의 표상이 된 그녀다.
근검절약정신, 나눔정신, 개척정신에다 뛰어난 경영철학을 지닌 김만덕 정신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
얼마 전 추자도를 당일치기로 다녀와 막 제주섬에 닿은
여섯 시 무렵.
페리에서 내렸을 때 아직 거리는 밝았다.
아침에 건너편 대로상에서 본 김만덕 기념관이나 객줏집을 둘러보기로 했다.
가는 도중 옛 건입포 안내문, 산지항 유물 출토 터, 거울가공 판매소 터의 표지석을 지나왔다.
제주항과 산지항 사이에 들어선 김만덕 기념관이라 산지항 축항 공사 중 한 동굴에서 출토되었다는 다량의 중국 한대 유물들.
그로 미루어 당시 이곳이 한반도와 중국, 일본과의 고대 교역에 징검다리 역할을 했음이 입증된다는
설명문도
읽
었다.
낯선 곳에 가면 늘, 부푸는 호기심으로 눈과 귀 쫑긋하게 만드는 새로운 풍광들과 만날 수 있어 생기 절로 넘치게 된다.
두 손 뒤로 묶인 죄인 모습의 처연스런 조각이 뜬금없다 여겨졌는데, 주정공장 수용소 4.3 역사관이 과거사와 곧장 연결시켜 줬다.
김만덕 고가인 원래 객주터에 들어선 기념관은 시간이 넘어 닫혀있기에 꿩 대신 닭, 인근 김만덕 객줏집으로 향했다.
복원품인 만덕 고가(古家) 세 채·객관(숙박시설) 두채·주막 하나에 창고 한채 등이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돼 있었다.
주막 외의 다른 건물은 외견만 스르륵 훑어볼 뿐, 방문이고 광문이고 굳게 잠겨있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동선 따라 돌면서 주변을 둘러봐도 이 지역은 한번도 와본 적 없는 곳으로 여겨져 왠지 생경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지도를 보니
건입동 뒷산인
사라봉에 올랐던 적도 있으며
종낭꽃 흐드러졌을
때
국립제주박물관도 다녀왔으므로 바로 인근까지 왔었건만 이리 낯설게 느껴지다니.
지척거리에 건입동이 자리했지만 당시엔 전혀 모르던 금시초문의 지명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
올
45
회 만덕상 수상자가 발표되며 시상 자리가 모충사라 하자 사라봉에서 내려오다 흘깃 스친 사당이 모충사였음도 상기됐다.
그
당시엔 동네 절이겠거니 했는데 사당이었다는 것 역시 한참 뒤에야 알았다.
의미를 모르기에 무심코 지나친 모충사, 역시 모르면 관심 갖고 볼 수가 없고 봐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으리라.
사당을 제대로 살펴볼 생각이 없었다는 건 안목 내지는 시야의 폭이 그만큼 좁다는 반증일 터.
일제 강점기 때
조국 독립을 위해 순국한 열사들의 충정을 사모한다는 의미의 모충사.
모충사에 들어서면 입구 정면에
의병항쟁기념탑, 우측에는 김만덕할망 기념비,
좌측에는 순국지사 조봉호기념비가 서있다.
시비
아래쪽 기슭에 만덕관과 그녀의
묘탑이
서있는데
뭘 모르니 태무심히 지나쳤던 것.
'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라는 편액글은 후손이 가보로 간직하다가 국립제주박물관에 기증, 오늘에 이어진다.
만덕 기념관 옆의 묘탑
이 시대를 가리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치워진 불행한 시대라고들 한다.
몇 해 전, 높은 자리에 있던 어떤 작자 말대로, 가재 붕어 개구리는 하천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천만에! 어림없는 헛소리이자 개수작이고 말고.
김만덕은 1739(영조 15)∼1812(순조 12) 시대를 산 조선 후기 여성으로 거상(巨商)이자 자선사업가였다.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2남 1녀로 태어나 12세에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잃었다.
고아가 된 그는 기녀의 수양딸이 되었고 십팔 세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다.
스물셋 나이가 되자 자신의 신분을 되찾으려 노력한 끝에 제주목사에게 청원을 넣는다.
‘본래 양가 출신이나 부모 잃고 기녀가 되었으니 다시 신분을 되찾아 주십사' 한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신분이 바뀐 후 그녀는 자기 노력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로 물자를 중계하는 객주를 열었다.
제주목 동문 밖에 차린 객주에서 말총·미역·전복·우황·귤 등 제주의 특산물을 한양 등지에 팔았다.
그 돈으로 제주에서 구하기 힘든 쌀과 소금을 사들였고 부녀자들이 찾는 뭍의 옷감이나 장신구, 화장품을 팔아 부를 쌓았다.
박리다매, 정가판매, 신용 본위로 정직하게 사업을 펼쳤으며 쌍방향 교역을 통해 사업은 날로 성장해 이미 거상이 되었다.
독신으로 사업에 매진해 관가에까지 물건을 대주게 되었고 많은 장삿배도 부리게 되면서 제주 제일의 부자로 부상했다.
정조 임금 때임을 대기근(1792~1795년)이 들어 섬에는 흉년이 계속되며 세 고을에서만 굶어 죽은 사람이 6백여 명이나 나왔다.
나라에서 보낸 구휼미조차 배가 침몰해 곡식 1만 석은 바닷속에 수장되고 말았다.
이때 김만덕은 자신이 근검절약하며 억척스레 번, 온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 500석을 사다가 굶어 죽어가는 도민을 살렸다.
당시 임금인 정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그녀에게 소원을 말해보라 했을 때 임금님을 한번 뵙고 금강산 구경을 하고 싶노라 했다.
인조가 내린 출륙금지령 때문에 제주도민 누구도 제주도를 벗어날 수 없을 때였어도 이 같은 소망을 피력할 만큼 그녀는 당찼다,
벼슬이 없는 사람은 임금을 만날 수조차 없던 세월임에도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내의원 벼슬을 제수받아 마침내 입궐할 수 있었다.
또한 소원이던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구경했는데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때를 미소로 회상하면서 눈 감았다던가.(넉히..)
사회개혁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정조임금은 이에 그치지 않고 신하들에게 김만덕 전기를 집필하라는 명을 내렸다.
해서 김만덕의 삶을 기록한 채재공의 <만덕전>, 이희발의 <만덕전> 등을 통해 지금에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훗날, 김만덕의 선행에 감명받은 추사선생은 ‘은혜의 빛이 온 세상으로 번진다/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글을 김만덕의 조카에게 써주었다.
이 편액글은 후손이 가보로 간직하다가 국립제주박물관에 기증, 오늘에 이어진다.
아무리 스토리텔링에 의해 누군가 미화되고 과장되었다 해도 실제 행적을 통해 평가되는 바, 그녀가 형편상 잠깐 기적에 얹혀던들 어떠하며 양민인들 어떠하리.
행여 좌절에 빠진 젊은이들이 있다면, 외치노니 조선시대 비천한 여인의 신분으로도 이러했음에랴.
역시 어떤 환경에 처해 살던, 인간 모두 다 제 노력할 나름이겠다.
굳센 의지와 용기만 있다면 개천에서 용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운명아! 비켜라!!! 젊은이들이여, 크게 소리쳐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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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지나니 만사 여유작작, 편안해서 좋다. 걷고 또 걸어다니며 바람 스치고 풀꽃 만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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