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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Oct 16. 2024

스프링데일 팜의 시월


미 동부 뉴저지의 시월, 핼러윈은 국화향을 타고 등황색 호박과 함께 온다지요.

키대로 선 옥수숫대 서걱거리는 스프링데일 팜에도 가을빛이 깊어지고 있었어요.

봄철엔 새콤달콤 딸기농장, 여름날 탐스러운 수박에 이어 옥수수 농장, 지금은 한창 향그러운 국화철이지요.

봉오리 총총 소담스레 문 국화분들이 줄줄이 앉아 간택받는 처자처럼 다소곳 음전하고요.

리본 곱게 맨 소녀가 마중하는 화원엔 철지난 여름꽃들 다듬지 않은 머릿결이 꽤나 어수선하더군요.

시월의 컨셉인 주황으로 물든 단풍잎, 솔방울, 잘 익은 도토리와 까치밥으로 만든 리스가 이쁘더라고요.

맥주통과 마차에 실린 핼러윈의 귀여운 소품들 표정이 살짝 미소 짓게 하고요.

초승달이 걸린 밤하늘 아래 유령이 날아다니고 부엉이 소리 음울하니 아주 으스스 한 분위기네요.

처마 밑에 매달아 둘 씨앗감일까요, 알알이 고르게 여문 옥수수는 마치 강원도 찰강냉이 같지요.


오밀조밀 귀여운 색색의 장식 호박들, 처음으로 조막만 한 이 호박을 보았을 때 얼마나 신기했던지요.

블록 새새에 이끼며 잡초를 파랗게 키운 습기 찬 화원 바닥을 무심히 밟아댈 수가 없더라고요.

여전히 생기 넘치는 베고니아 붉은 꽃 아래 국화분들이 이젠 내 시절이야~슬몃 밀쳐내며 채근하는 듯.

이 모든 게 이주 노동자의 싼 임금으로 누리는 호사일 텐데, 어느 지역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은 멕시칸이더군요.

농장 안을 한 바퀴 도는 트랙터 열차를 타고 저 안 깊숙이 들어가면 호박밭이 있어 각자 맘에 드는 호박을 골라가며 딴다는데.

트랙터 열차의 좌석은 짚단, 나들이 온 가족이 밀짚단에 올라앉아 아이들과 마주 보고 한담 나누데요.

해묵은 고목 둥치째로 꺾여나간 농장 집 뜰에 핀 색색의 꽃들은 가을 햇살 한 줌도 아쉬워하고 있네요.

무서리 하얗게 내릴 때까지 국향 흐르리니.... 국화가 바야흐로 제철을 맞았답니다.

사진: 픽사베이

일요일 성당 마친 다음 간만에 교우 아닌 글 친구와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요.

모델 뺨치는 멋쟁이를 만나려니 그에 어느 정도 격은 맞춰줘야....

바로 엊그제 짧게 커트치고 뽀글 파마를 한 머리라 밤새 컬을 말고 불편한 잠도 마다하지 않았더랬지요.

새벽녘 안개비에 젖어가며 앞뜰 낙엽을 삼십 분쯤 긁고 나니 굽실굽실 웨이브 진 머리는 간데없어지고요.


꼬불꼬불 용수철로 되돌아간 (숱이 적은 데다 머릿결 명주실처럼 힘이 없어서리 꼬불파마) 헤어스타일이라 대략난감이나 약속은 약속.

모자를 덮어 쓰려다 성당에서 너무 눈에 띄는 거 같아 망설여지더라고요.

하늘은 여전 우중충~ 날씨 핑계 삼아 그대로 용감히 나섰지요.

어제 계획은 스타벅스에서 차나 한 잔 하려던 것이었는데 모처럼의 귀한 시간을 실내 딱딱한 테이블에서 허비해 버리기 아깝다면서요.


차차 날씨도 개인 다니 야외로 장소 변경을 하자며 도중에 갑자기 연락이 왔지 뭡니까.

어스레한 커피집이 아니고 가을볕 화사하게 내리는 꽃집농원이라~햐!

스타일 팍 구기게 생겼지만 뭐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녀는 산들거리는 노랑 빛깔 고운 바지에 스카프까지 처억 둘렀는데 완전 구닥다리 촌할매 등장으로 가을 풍경을 영 망가뜨렸지마는, 우짤낍니껴.

동네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어 자주 스쳐지나기는 하나 별로 들릴 일이 없던 스프링데일 팜.

핼러윈을 앞두고 한 번은 가볼 만한 곳이라 내동 벼르던 데가 거기였지요.

챙길까 말까 하다가 그래도 들고 간 카메라 잽싸게 꺼내서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마구 눌러댔네요.

이런 뜻밖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오늘 미사 중에 기도를 참하게 했던 모양이죠.

이 모든 건 매사에 운용의 묘를 살릴 줄 아는 벗님의 센스 있는 결정 덕이었답니다.

역시 탁월한 선택~.

덕분에 시월 팜의 사진도 얻고 가을바람도 쐬고 브런치 삼아 갓 구운 호박파이도 먹고요.

뉴저지의 시월엔 호박파이에 사과 사이다 챙겨 먹지 않고 지나면 그도 섭한 일이거든요.

야외 테이블에 앉아 분위기 잡고 모처럼 오후시간 유유자적 즐겼으니 이래저래 횡재한 날이었지요.

가만, 어젯밤 무슨 꿈을 꾸었더라. ㅎㅎ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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