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Oct 20. 2024

혼인지, 신행 가는 날

혼인지 축제가 성산읍 온평리 혼인지 일원에서 시월상달에 열렸다.

열 시 정각에 맑고도 은은하게 퍼지는 징 소리를 시작으로 온평리 열운이 결혼식이 혼례관 앞 잔디마당에서 펼쳐진 것.

1918년에 쓴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따르면 어느 날 동해안에 각종 씨앗과 마소와 세 공주가 탄 나무 함이 둥둥 떠왔다고 한다.

열운이란, 파도를 타고 온 바로 그 목함이 멈춘 곳인 연혼포를 이른다.

제주도 개국신화를 바탕으로 고, 양, 부 삼신인과 바다 건너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가 혼례를 치른 장소가 혼인지다.

그 후 일가를 이뤄 크게 번성한 그들은 탐라국의 기틀을 단단하게 다졌다.

벽랑국이라는 해외 인과 최초로 국제결혼을 한 곳인 열운이 혼례처럼 다문화 가정을 이룬 부부를 대상으로 이날의  의식은 진행됐다.


양털 구름 가득 깔린 가을 하늘 높이 결혼식을 축하하는 연이 두리둥실 떠있었다.

혼례식은 청실홍실 엮듯 남과 여가 한 가정을 이루어 새 출발하는 의미를 새기며 이를 주위 분들에게 알리는 의례다.

이날 치러진 신행(新行)은 신부가 가마를 타고 신랑집인 시집으로 처음 들어오는 행렬을 말한다.

초행(醮行)은 혼인하기 위하여 신랑이 목기러기를 안고 신부 집에 가는 것이고, 신행은 혼인하고 나서 신부를 데리고 돌아오는 의식이다.

혼인지 마을 전통혼례문화를 통해 제주의 전통음식과 혼인잔치 인심을 접했는데 아직까지도 넉넉한 정이 넘쳐나는 훈기를 느꼈다.


신부집에서 대례를 마친 신랑이 이튿날 신부를 데리러 처가로 행차하는 날.


혼례식을 알리는 징 소리 맑고도 명징한 파장으로 은은히 울리면서 신랑이 새 식구 맞음을 조상께 고하며 재배 의식을 올렸다.


마을 이름대로 따사롭게 스며드는 평온감이 반세기 전의 고향 풍정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했다.

쫄깃한 오메기떡과 푸짐한 잔치국수 맛에 빠져, 진짜 잔칫상에 앉아 만포장 먹어대는 이웃마을 아주망같이 느긋한 기분이 들었다.

 제반 잔치 음식 일체를 차려내는 과방은 종일 분주하게 흥청였다.


여남은 살 무렵 충청도 당진에서 여러 차례 보았던 결혼식 풍경들이 두서없이 겹쳐졌다.

친가가 있는 매방리 할아버지 댁, 안마당과 바깥마당에 광목 차일이 쳐지고 찬회 당숙, 현회 당숙, 갑회 고모, 기회 고모가 혼례를 치렀다.

며칠 전부터 조청 고아 산자를 만들고 다식판에 들기름 발라 송화며 흑임자다식 찍어 과방에 갈무렸다.

당연히 술을 빚고 식혜 삭혀 항아리에 담아두었고 떡도 골고루 시루떡 무지개떡 송편 증편 인절미에 부침개 종류별로.

촌구석이지만 대농인 작은할아버지는 두 아들을 사범학교에 보내 교사 아내 감으로 참한 며느리들을 보았다.

중학만 마친 당고모들은 피부가 보얀 올케언니를 맞았지만 당고모들은 얼굴이 까매 혼례날 찍은 연지 곤지도 어쩐지 겉돌았다.  

딱 부잣집 맏며느리감인 달덩이같이 훤한 인물임에도 당고모는 촌티를 못 벗어나 활옷을 입혔어도 오종종했다.

외가는 대호지에 있었는데 아들 농사에 성공한 셋째 외숙은 보조개가 예쁜 도회지 며느리를 봐 근동에 소문이 둥둥 떴었다.

공부를 한 기홍이 오빠, 기수 오빠 각시는 키도 늘씬한 데다 집안까지 좋아 예단 또한 동네방네 구경거리일 만큼 굉장했었다.

반면 방자 이모며 기순 언니, 기복 언니는 바지락 캐고 굴 따러 갯가에 나다니느라 새카맣게 탄 피부 반질거렸다.

혼례날이라고 안 하던 꽃단장을 시켜, 분 바르고 연지 곤지 찍었지만 안타까울 정도로 그녀들은 촌스러웠다.

필우 외삼촌과 종우 아재는 인천에 나가 대처 떠돌며 반 건달처럼 지내더니 데려온 색시도 근본 없다는 쑥덕거림이 돌았다.

유유상종이란 말을 몰라서 그렇지, 어린 눈에도 저리 살면 안 되는 거구나 싶었다.

허나 긴 세월 살고 보니 사는 게 별거 아니더라 싶기도 하고, 지나온 삶 도토리 키재기였을지라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싶은 이 애매모호함....

병풍 둘러친 초례청에서 고개도 못 들고 수줍던 그 새색시들은 어언 구순을 향해가고 있으며 유명을 달리한 분도 적잖다.

대단한 뭐라도 될 거 같이 혈기방장하던 풋풋한 젊음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잠시 한눈 판 사이 꽃은 지고 강물은 저만치 흘러 흘러갔으니.

다문화가정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국제결혼이 있었던 열운이 마을 남정네가 일본인 새 각시를 맞는 날.


마을 경사에 온 동네 사람들 모여 두둥실 두리둥실 어화자 좋다~

돼지고기 수육을 국수에 말아 후루룩~푸짐한 인심이 스며든 잔치국수 푸짐했다.

청포를 입고 재연하는 유교식 마을제 재연과
환상미에 빠져든 한국 전통무용 공연은 눈을 호사시켰다.

연습 기간이 길었을 듯 한 70대 이상 어르신들의 생활체조가 그 뒤로 이어졌다.


절도 있고 신나게 방망이질하듯 타다닥 난타 공연 한마당도 빠질 수 없었고 다이내믹 경쾌한 줌마들 댄스타임도 신바람 돋웠다.


관객석 모두 다 같이 손뼉 치며 흥겨이 즐기는 혼인지 축제는 행운권 추첨을 끝으로 폐막됐다.


풍악소리 잦아들며 혼인지 행사장 구경꾼은 썰물처럼 빠지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 추수 마친 오후, 빈 들녘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