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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Oct 20. 2024

추수 마친 오후, 빈 들녘에서

언제부터 꼽아야 할까.

하논 논농사에 관심 갖고 드나들기 시작한 시기는 지난 만추부터였을까.

보다 실제적으로, 정기적으로 하논을 찾기 시작한 때는 올 초부터였다.

이른 봄, 논바닥에 연분홍으로 깔린 자운영꽃을 갈아엎어 퇴비로 땅심 돋워줄 적부터 지켜봤으니까.

통통통 경운기가 지나가고 나면 검으레 차진 흙 속으로 자운영은 속절없이 사라져야 했다.

봄비 보슬거리던 어느 날 가보니 못자리에 새파랗게 자란 모가 한들거리고 있었다.

벼농사는 못자리가 절반을 차지한다는데 모판 다듬어 볍씨 파종할 적은 놓쳤지만 모내기하는 날도 왔었다.

모를 쪄서 뭉치 뭉치 던져놓았다가 이앙기에 올려 모내기를 하는데 첨 보는 광경이라 신기 신기했다.

그만큼 자주 왔으니 눈 감고도 갈 수 있겠으나 그건 농담인 것이, 흐미~ 자칫 늪처럼 뻑뻑한 농수로로 빠질 수 있을 테니까.

한여름엔 논배미에서 와글거릴 개구리 소리 들으러 저녁 어스름부터 와 밤을 기다렸다.

연연하게 나부끼던 모는 어느새 짙푸른 벼포기 되어 두 뼘 너머 자라 논바닥이 안 보일 정도였다.

들길 걷다 보니 잠자리가 날아다니기에 또 하논으로 왔다.

아니나 다를까, 시퍼런 벼가 출렁출렁 파도치는 그 위로 잠자리가 떼 지어 날았다.

농수로엔 실잠자리 왕잠자리, 하늘엔 밀잠자리 고추잠자리 장수잠자리 모두 모두 여기서 다시 만났다.

얼마 만인가, 실잠자리 장수잠자리를 다시 본 것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더, 하논 들판은 황금벌판으로 변해갔다.

가을볕 따가워지며 알곡 탱글탱글해지자, 추수하는 날만 기다렸다.

드디어 며칠 전엔 콤바인으로 척척척 벼 수확하는 풍경을 접했다.

마치 내가 직접 논농사라도 지은 듯 눈가 뜨거워지는 감격으로 뿌듯해졌다.

하논에는 이제 논바닥에 남은 이삭 쪼으려, 백로 황로 황새 큰고니 왜가리 등등 후조 떼 날아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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