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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무량화
Oct 26. 2024
운주사 안개
때 이른 가을 기운이 들며 날씨는 청명, 어느새 전형적인 가을 느낌이 난다
.
덩그러니 너른 아파트는 아예 세컨
홈이 될 정도로, 언니 내외는 수시로 캠핑 용품을 싣고 전국 각처의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며칠 전 봉화 휴양림으로 향하다 차창
통해 찍은 농촌 사진을 전송해 왔다.
요행히 시골 장날을 만나면 깻잎도 사고 토란대, 고구마 줄기도 사면서 그런 음식 즐기는 내 생각한다는 언니.
우리나라 산야가 이처럼 빼어난지 몰랐다며 아름다운 숲과 계곡 함께 돌아보게 어서 다녀가라고도 했다.
한국인들 경쟁하듯 하는 해외여행, 언니 역시 지구촌 이름난 장소는 다 섭렵하더니 이제야 내 땅의 참가치를 발견한 모양이다.
보내준 가을 들녘 사진을 보고 있자니 운주사 가는 길가의 깻잎 향이 떠오르고 메뚜기떼도 생각났다.
그 풍경 액자 속에는 지금도 자주 카톡 나누는 열 살
위인
부산 친구가 들어있다.
그녀는 70년대부터 부산 사협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다.
초창기엔 지리산 종축장 면양 떼를 따라다녔고 사찰 문살 꽃문양을 찾아 고찰 순례에 나섰다.
한때는 연밭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니더니 나중엔 석탑과 부도탑에 낀 이끼에 매료돼 <돌의 향기>란 사진집을 내기도 했다.
아직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기 전부터 그녀는
남편 따라
일본으로 유럽으로 출사 여행을 다녔다.
해체되기 전 국제그룹 상무였던 남편의 든든한 외조 덕에 고가의 독일산 사진장비는 물론 집에 암실까지 갖
추었던 그녀였다.
우리는 박물관학회가 주관하는 경주 불탑골 답사길에서 처음 만났다.
사진을 하는 그녀 덕에 남도에서 억새꽃이 가장 볼만한 곳도, 범어사 뒤편에 은밀히 숨은 등운곡의 비경도 알아낼 수 있었다.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후 우리는 죽이 맞는 친구로, 가까운 금정산을 오르내렸고 남도 여러 곳을 동행하는 도반이 되었다.
대흥사, 낙안읍성, 화엄사, 내소사 등등... 그러면서 우리에겐 공동의 추억이 수없이 쌓여갔다.
거의 당일치기로 다니느라 숨 가빴지만 우리끼리 은어처럼 통하는 숱한 얘깃거리들로 지금도 한바탕 웃곤 한다.
'탁본은 잘 찍혔나요'라 하면 예술한답시고 겉멋 들린 얼치기를 이르는 말이고, '동백은 피었습디까'는 넌지시 수작 걸려는 싱거운 이를 지칭하는 말.
'새벽안개'는 고찰 구경 가자는 우리만의 은어였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아무래도 안개 깊은 운주사다.
어느 해 초가을, 전라도 화순이 초행길인 우리는 주소 하나만 들고 겁도 없이 광주에서 다시 시골버스를 갈아탔다.
버스기사는 해지는 쪽을 가리키며 오후 늦은 시각
,
인적 없는 한적한 시골길에다 우릴 내려놓고 떠났다.
그의 손끝이 짚어준 방향만 가늠하며 이정표도 없는 황톳길, 조붓한 신작로를 무작정 걸어갔다.
생판 낯선 곳이니 어둡기 전에 그 길의 끝으로 가야만 했다.
표현은 안 했지만 은근 겁도 나, 절박한 심정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도중에 자전거를 탄 학생이 지나가기에 다급히 손을 흔들어 세웠다. 그 학생이 등댓불처럼 반가웠다.
운주사를 물으니 거의 다 왔다며 십 분쯤 곧장 더 가라고 했다.
그제야 안도한 우리는 들길 양옆으로 펼쳐진 논의 벼 이삭도 구경하고 들깻잎도 쓰다듬어가며 여유롭게 걸었다.
논에서는 잠들려던 메뚜기떼가 튀어 올랐고
누리끼리해
진 들깻잎에서는 짙은 향이 묻어났다.
절 지붕이 어둠에 잠겨들 무렵 운주사에 도착한 우리는, 부산에서 왔는데 하룻밤 머물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 시절만 해도 절 인심이 박하지 않은 때였고, 사실 한밤중에 온 두 나그네를 막무가내 내칠 수도 없었을
터였
다.
방 한 칸만 빌려줘도 감지덕지인데 노보살님은 정갈한 저녁상에 풀기 빳빳한 이부자리도 갖다주셨다.
그런데...... 세수를 하려고 교교한 달빛 밟으며 우물터에 나왔다가 안개를 보고 기겁할뻔했다.
보얀 안개가 지면을 덮다시피 한 채 발밑에서 굼실굼실 뭉터기로 기어 다니는데 완전 전설의 고향 세트장 같았다.
흙담을 넘으며 구렁이가 허물을 벗어 걸쳐놓았음직하게 괴기스러운 밤안개였다.
청남빛 하늘엔 은하수도 흐르련만, 북두칠성도 보이련만, 다 제쳐두고는 얼른 방으로 쫓아 들어오고 말았다.
비몽사몽 잔 것 같지 않게 뒤척대기만 한 듯싶었으나 곤한 잠에 빠져들었던가, 새벽에 일어나 보니 친구가 없었다.
뭔가에
홀린 듯도
싶고
이상한 꿈을 꾼 듯도
해 멍하니 앉아있는데 종종걸음 치는 친구 발소리가 들려와 문고리를 밀어젖혔다,
토방에 선 그녀 발등은 흠씬 젖어있었고 하얀 바짓단에는 풀물이 들어있었다.
해 돋기 전에 한 바퀴 돌며 사진 찍고 왔다는 그녀는 안개가 혼자 보기 아까우니 어서 나가자 채근했다.
세상에나~밖은 지척 구분도 할 수 없게 온 사방이 안개로 빽빽해서 걷는다기보다 몽유병자처럼 둥둥 부유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친구는 이미 천불 천탑 터를 빙 돌아보고 왔다는 바람에 '담도 크시지, 무진기행 하며 귀신이랑 놀았겠어요.'
눙치고 말았지만 사실 안개가 하도 깊으니 걸음 품새마저 허뚱거려졌다.
햇살이 퍼지자 안개는 소리소문 없이 걷혔고 우리는 그제서야 운주사 와불을 향해 산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니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나서 운주사가 생각나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팔십 줄로 다가선 그녀는 하필 그때
병원에서 관절 통증 치료 중이라 길게 수다를 떨 수 없었다.
"밤안개도 호시절 얘기네요." 했더니 그녀는 "아~옛날이여, " 하면서 그래도 여전히 하핫 여장부답게 웃었다.
허나 시니컬한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기도 좀 해줘요,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 그만 눈 감을 수 있게요."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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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지나니 만사 여유작작, 편안해서 좋다. 걷고 또 걸어다니며 바람 스치고 풀꽃 만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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