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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Oct 26. 2024

光陰 사이로

일찍이 시어(詩語) 곁에서, 소설의 행간 사이에서 향기로이 내게 다가온 충무였다. 그뿐 별다른 연고없이 그저 한려수도나 다도해 들머리로만 여겨온 그곳.  지난봄, 아들이 강원도 인제 전방에서 배속받아 옮겨온 곳이 우연히도 남쪽바닷가였다. 비로소 충무나 거제도와의 한가닥 인연고리를 갖게 돼 내심 어찌나 반갑던지.


남해를 끼고도는 소로 연변에 코스모스 한창인 시월. 아들네 식구와 함께 가을볕 부신 한낮, 고성 상족암에 닿았다. 잔잔한 해면에 연잎처럼 동동 섬 몇 개 떠있는 한적한 포구였다. 모래나 몽돌로 이루어진 여느 해변과는 달리, 바다로 흘러 들어간 암갈색 반석이 드넓게 펼쳐진 해안가. 마침 썰물이라 바위가 많이 드러나 있었다.



판판한 암반 중에 뚜렷이 찍혀있다는 공룡 발자국. 환호소리만 따라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 흔적이었다. 발톱 셋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발자취로 미루어 거구인 듯 보폭이 넓은 반면 코끼리 발자국 닮은 건 간격이 바투게 찍혀있다. 둘리라는 아기공룡 만화 캐릭터가 떠올라 발짝 포개가며 따라가자니 점차 발길이 급해진다. 채 굳지 않은 용암이 뜨거웠던가. 아니면 끊임없이 분출되는 화산에 이어 지진의 진동 기미라도 느껴졌던가. 가까운 분화구에선 여전히 연기가 치솟고 있었으리라. 부글부글 소용돌이치는 바다. 요동치며 뒤척대는 육지. 하늘은 온통 벌겋게 달아 있었을까.


환청인가. 문득 허공 향해 우우 부르짖는 낯선 소리가 아스라이 울려온다. 억겁의 시간 건너 중생대 백악기 시절 공룡 천국이었다는 이 자리. 지금처럼 드나듦이 많은 리아스식 해안에 봉긋봉긋 나지막한 동산 두른 포구가 아니었을 것이다. 융기와 침식 거듭하며 쉼없는 지각변동으로 그 모양 달리해 온 지표면. 하여 알프스 고지에서 바다공룡 화석이 발견되는 것쯤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시는 한반도란 개념 대신, 유라시아 대륙의 일부로 파악되었을 땅이다. 사바나의 초원지대같이 짙푸른 풀숲 우거진 온난한 기후대가 한동안 이어져 소철이며 양치류 고사리가 울울히 삼림 이룬 여기에 덩치 큰 공룡 노닐고 천공에는 익룡이 나래 퍼덕였을까.


나의 공룡 상식 수준이라는 것이 스필버그의 상상력 범주 이상을 비껴 나지 못하다 보니, 그가 쥐라기 공원에서 보여준 대로 가공스런 힘을 지닌 거대한 파충류로만 입력되어 있는 공룡. 어마어마하게 큰 몸집에도 민첩하게 치달리며 거칠 것 없이 한시대를 제압하다가 어느 순간 지구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동물이다. 급격한 자연재해 혹은 운석충돌 등의 천재지변으로 멸종됐으리라는 호기심어린 가설만 무성케 한 채로 연극무대를 떠난 공룡. 여기저기 거대한 뼈며 큼지막한 알 화석을 남겨둔 채로. 더러는 이렇듯 발자국 찍어둔 채로.


일억 몇천 만년 전 그때를 증언하듯 산언저리를 감싼 잿빛 암석층의 기기묘묘함은 또 다른 경이였다. 견고한 퇴적암 지층이 포개포개 책을 쌓아 놓은 듯, 고물 켜켜이 얹은 시루떡이듯 이채로운 형태다. 고목의 나이테 단면 같은 촘촘한 켜 한 층에 몇 세기가 압축되어 있을까. 토기 조각과 흡사한 지층 파편 한 조각을 주워들었다. 얇으면서도 쇳소리가 날만큼 야문 암석층 위로 아득한 일월 거슬러 먼 먼 중생대가 어른거렸다.


순간 저절로 눈이 감겼다. 형언할 수없이 벅찬 그 무엇 때문이었다. 까마득한 시간대와 마주한 가슴 뻐근한 감회, 숨막히다 못해 그냥 침묵하게 하던 그랜드 캐년에서도 그랬다. 돌연 눈물 솟구치게 하던 붉은 단애의 장엄한 대서사시가 다시금 생각났다. 한눈으로 지층 형성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그랜드 캐년이다. 맨 아래층은 고생대 그 이전에 형성된 것이라니 가늠조차 겨운 아주 먼 태고적이다. 생물이 나타나기 이전의 지질시대를 거쳐온 그랜드 캐년과는 응축된 시간의 단위도 엄청 차이가 나고 방대한 규모 면에서도 비교대상이 아닐 수 있겠다. 그러나 중생대 역시 얼마나 멀고 먼 광음 저편인가. 인류가 출현한 것이 신생대 후기이니 그야말로 억겁의 세월 저편이 아니랴.


실로 일월의 무궁함 앞에 서면 찰나를 사는 한점 티끌인 인간이란 존재에 연민이 깊어진다. 손 맞잡고 여기 온 우리 가족 삼 대를 합쳐도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시각은 고작 이백 수십 년 남짓. 광음(光陰) 속의 일촌(一寸) 일 따름이다. 찰나, 극히 짧은 순간임에도 그 사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충격파가 파도치듯 밀어닥치는 인생사.


꽤 시간이 지났던가. 어느새 발아래로 제법 차오른 바닷물이 암반 위 공룡 발자국을 덮어나갔다. 또 하나의 커다란 전환기,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는다고 떠들썩한 우리를 보며 싱긋이 웃음 지을 손 안의 한 켜 지층 조각에도 온기가 스며있었다. 햇살도 많이 기운 오후, 가녀린 켜를 남기며 광음 사이로 한 세기가 마악 접혀간다.

 - 99년 / 수향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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