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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Dec 04. 2024

월라봉에 노을 탱고처럼 스며들고

감귤박물관은 두어 번 갔으나 박물관이 깃든 월라봉은 그날 처음 올랐다.


집과 가까운 위치인 곳은 언제든 올 수 있다 싶어 오히려 등한시하게 된다.


만만하게 여겨지기도 해 우선순위에서 밀리기도 한다.


그날은 시청 서포터즈 팀원들의 귤 따기 체험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처음으로 귤을 따보는 일도 흥미롭지만 내심 눈길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일석이조, 말만 잘하면 님도 보고 뽕도 따겠네!


매주 수요일은 사회적 약자 한정으로 숲생태해설사와 함께 월라봉 생이소리길을 걷는다는 공지글이 시선에 확 들어왔던 것.


모든 이벤트마다 참여하려면 사전 예약이 필수다.


시월 행사 일정 안내를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체험 프로그램이었다.


해서 꼭 생이소리길을 걸어볼 생각이었으나 막상 와보니 어느 결에 행사 마무리 단계였다.


아니 벌써? 미처 몰랐는데 이날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당시 참가신청자가 전무해 취소시킨 일정, 노약자도 사회적 약자라고 생떼를 써서 어거지로 월라봉을 오를 수 있었다.(하긴 이 시대에 운전 못하는 사람도 장애인에 속함.)


초입에 군락 이룬 달빛바위며 마을제 지내는 포제단을 비롯, 명칭과 달리 산뜻한 말오줌나무 꽃 그리고 129살로 최고령인 하귤나무 등등. 귀에 쏙쏙 들어오는 차분한 명품 해설에다 깜짝 퀴즈로 안겨준 선물도 푸짐했다.


생이소리길 들머리에 군락 이룬 거대한 바위들이 볼만하고 이름 운치있는 달빛바위인데 막상 달밤에 보면 괴기스럽지 않을까.

 

구멍 숭숭 동굴 뚫린 화산암에 온갖 식물 얼크러 설크러졌고, 바위를 덮은 여러해살이 양치식물인 외뿔석위가 바위를 점령했다.


해설사가 알려준 말오줌나무꽃은 의외로 색깔 곱고 모양도 특이하게 생겼더랬다.


구름 낀 날씨라 정상 전망대 풍경은 수묵화로 섶섬과 지귀도 제지기오름을 분위기 있게 그려냈다.


이처럼 맨첨 생이소리길을 걷던 날은 약간 흐린 날씨였다.


한라산이나 서귀포 앞바다 전망이 훌륭해 다음번엔 푸른 하늘에 날씨 화창할 때 다시 올라와야지 작정했더랬다.


어제가 바로 운(​雲) 좋고 일기 조건 안성맞춤인 날, 그러나 꾸물대다가 오후 늦게야 집을 나섰다.


월라봉에 오를 즈음 벌써 숲에는 어스름이 깃들었다.


달빛이 동쪽으로 솟은 봉우리를 훤히 비춘다고 해서 ‘달암(月岩)’ 또는 ‘다라미’라고도 불렸다는 월라봉.  


초입에 울멍줄멍 솟은 서국돌, 일명 달빛바위들이 반겨 맞아준다.


산책길 잘 다듬어져 있고 운동 나온 주민들도 더러 오가는지라 전혀 휘휘하진 않았다.


이날은 바위 사이로 한라산도 또렷하게 드러났다.


하늘 가득 양털구름 멋진 날 달빛바위 사이로 멀리서 모습 드러낸 한라산 백록담

정상에 올라 섶섬 바라보다가 서쪽으로 시야를 돌리니 양털 구름 좌악 깔린 하늘에 석양 황홀했다.

산을 내려와 감귤박물관 전망대 격인 귤왓뜨락 쉼터에서 바라본 노을빛은 더더욱 대단했다.

실로 경이로운 장엄낙조와 마주한 이 행운이라니.

심장이 타악기 소리를 내며 점점 더 쿵쾅댔다.

어느 먼먼 태곳적, 마그마 힘껏 솟구치자 그리하여 온데 화염 휩싸여 불길 겁나게 마구마구 번지는 양.

진주홍은 시간이 흐를수록 진다홍으로 붉게 붉게..... 허공 가득 쌓인 장작더미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듯했다.

중세시대 화형식이 벌어진 현장에 마녀 대신 곰솔이 사지를 비틀며 몸부림치는데 그마저 환상적 아니 치명적이었으니.

마치 탱고 선율처럼 관능적으로 스며드는 화려한 색조, 그러나 정열적면서도 어딘지 비감스러워 쓸쓸한....

애조 띤 반도네온에, 스타카토 찍어내는 바이올린에, 묵직하게 떨리는 첼로에, 자유분방한 기타에, 깊이 울리는 작은 북소리.

감미로운 너무도 감미로운 유혹이었다.

이에 홀려들지 않는다면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목석이리라.

전율에 휘감긴 채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눈부신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오래도록 그렇게.

사틴 자락 부드러운 어둠이 숲에 드리울 때까지 서녘을 응시하며 붙박인 채 그대로 조용히 서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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