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로 번지는 일출

틴들현상

이른 아침인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 시간대에 전화할 사람이 없기에 순간 긴장이 됐다. 뜬금없이 동래 친구의 전화였다. 그녀는 거두절미하고 빨리 일출 보러 나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창을 열고 하늘을 둘러봐도 쾌청은커녕 아주 우중충했다. 내 편에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니 구름 잔뜩 낀 저런 하늘에서 뭔 일출 구경이래유? 지금 바닷가에 왔는데 흔치 않은 틴들현상을 만났으니 춥지 않게 단도리하고 무조건 빨랑 나와보란다.

수십 년 이상 사단에서 활동한 원로급의 초대다. 찌릿하며 짚이는 게 있었다. 잽싸게 장갑 모자를 챙기고 두툼한 재킷 차림으로 뛰어나갔다.

현관문을 여니 뜻밖에도 친구가 턱 하니 서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놀래라! 외쳤다. 그녀는 빨리 갑시다~하며 성큼성큼 해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까보다 빛이 약해졌다면서 그녀 발걸음이 무척 빨라졌다. 급하게 내달려 바닷가에 섰다.

그렇게 틴들 효과(The Tyndall effect)를 만났다. 틴들현상(Tyndall phenomenon)이라고도 하는 빛 내림 효과는 구름 틈 사이로 해가 지나가며 빛줄기가 강렬하게 분사되는 신비스러운 현상이다.

종교영화에서도 더러 경이로운 분위기를 연출할 때 차용된다. 창호지 문에 난 작은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도 어두운 방 안에서 쏘는듯한 그 현상을 접하게 된다. 사막을 지나가면서 먼 하늘가에 국지적으로 소나기가 쏟아질 때도 나타나 전율 일게 만들었다.

빛의 파장에 따라 민감하게 변화하는 놀라운 현상을 이처럼 가끔 접해보긴 했으나 틴들이란 단어는 난생처음 들었다. 1868년 물리학자인 영국의 존 틴들(John Tyndall)의 실험 결과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사진 하는 사람들은 오메가 현상이라 하여 맑은 날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 아래 생기는 또 하나의 해를 포착하는 횡재를 만나기도 한다고 했다. 둘 다 바닷가에서 주로 포착되는데 기상상태에 따라 선물처럼 잡을 수 있는 현상이란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구름 바다 파도. 선 위치에서 조금만 각도를 바꿔도 달라지는 풍경이다. 같은 장소에서 순간적으로 연달아 찍더라도 하다못해 파도 모양이 달라도 다르므로 사진 표정은 제각각이다.

화물선도 지나가고 거북선 닮은 배는 모래를 실었는지 하도 천천히 전진해 마치 섬 같다. 고깃배도 몇몇 스치고 갈매기도 뜬다. 쉴 새 없이 찍어댄다.

지금껏 친구와 나들이를 자주 다녔어도 사진을 배워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언제라도 맘만 먹으면 배울 수 있으니까. 헌데 친구가 수도권으로 이사를 결정한 지금사 갑작스레 급해지는 심사.

취미와 성향이 비슷해 적잖은 나이 차 상관없이 절친으로 지내던 그녀다. 헤어질 날이 가까워질수록, 남겨진 시간이 짧아질수록 아릿해지며 아쉽기만 하다.

 바깥분 아침상을 차려야 한다며 급히 지하철로 향하는 그녀 등에 대고 퉁박을 줬다. 보소 마~사람 맴에다가요, 아련스런 추억만 요래 자꾸 덧쟁여두면 우얍니껴? ​

문득 기분이 멜랑꼴리 해진다. 매일 활기차게 나돌아 다니느라 심심하다거나 쓸쓸한 감정 따위 모르던 나였다. 낮게 가라앉으며 눅눅히 젖어드는 이 느낌, 전에 없던 묘한 심사다.

허어~뉘 있어 일출 보러 가자고 새벽부터 전화해 날 불러낼꼬.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기에, 오랜 경험으로 아는 빛의 효과 좋은 날을 같이 나눌 수 있었는데.

그런 친구가 위쪽 지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늘 그래왔듯 아무 때나 만나볼 수 있다고 당연히 여긴 일들이 앞으론 어렵게 됐다.

인간사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 역시 필연임을 익히 알면서도 마음 왠지 수수롭다. 會者定離 去者必返(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 하나 어언 팔순의 그녀다.

수십 겁에 걸친 친구 인연으로 만났으니 이사를 가도 다시 만나볼 수는 있을 터다. 허나 이렇듯 수채화로 번지는 풍경을 언제 또 친구가 불러내 같이 바라볼 수 있을는지.

해는 날마다 새롭게 떠오를 테지만 한 폭의 그림을 마음과 마음에 새겨둘 이런 기회가 정녕 있기나 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