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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Nov 06. 2024

엷은 미소마저 좋으셔라, 석조여래좌상

미국에 가기 위해 미리 서울에 올라왔다.

만일의 경우 제주공항 기상상태가 여의치 않으면 항공편이 결항될 수도 있기에 앞당겨 온 것.

제주와 달리 서울시내 처마다 무르녹은 만추였다.

틈새 시간을 이용해 단풍진 숲을 찾기로 했다.

애초 목적지는 창덕궁이었다.

만추의 후원 숲과 낙선재를 거닐고자 해서였다.

맘먹고 찾은 날이 하필이면 휴무일, 도리없이 발길을 돌렸다.

다른 궁궐도 마찬가지일 터라 꿩대신 닭, 청와대나 다녀오자 싶었다.

이미 작년 봄에도 북촌 구경 다가 식당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어정쩡해 들린 바 있는 청와대다.

그때는 관저 뒷산 전망 좋은 위치에 모셨다는 신라 불상은 만나지 못했다.

산 중턱까지 오르기 어렵다는 동행이 있어서였다.

아쉽게 접고만 불상과의 랑데부를 위해 걸림없는 발길은 만추의 청와대로 향하였다.

지도를 펼쳐보니 거리상으로 걷기에도  알맞춤했다.

은행잎 휘날리는 계동길 걸어가며 지금은 아라리오 뮤지엄으로 바뀐 김수근선생의 '공간' 건물 바라보다가 어찌어찌 중앙고와 헌법재판소도 스쳤다.

북촌로를 따라 걷자니 뭇 식당가와 한복대여점과 화랑가 이어지고 경복궁 길 지나자 청와대가 나타났다.

본관은 그저 먼발치로만 일별하고 관저로 직진했다.


'신라 불상"이자 '미남석불’로 알려진 청와대 안 녹지원 뒷산 중턱의 석불좌상과 토함산 석굴암 부처님은 동일한 형식이다.

자비로이 엷은 미소를 머금은 데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자세다.

문자 그대로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가  무리를 항복시키는 (手印)이라고.

이는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 순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왼손은 펴서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단전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펴서 무릎 아래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좌대(앉은 자리)는 방형(사각형)으로 초화(연)조각돼 있다.

경주 이거사 터 출토품으로 알려졌으며 '경주 장형대좌 석조여래좌상 (慶州 方形臺座 石造如來坐像)’이란 명칭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77호가 됐다. 이거사는 “성덕왕이 736년에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 지냈다.” 라고 심국사기 기록에 나타난 고찰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성덕왕조’에 기록될 만큼 유서 깊은 이거사로 이 불상은 통일신라 시대 유물로 알려졌다.

경북 경주시 도지동. 신라시대에 이거사(移車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이거사 터에 있던 이 석불은 조선왕조가 문 닫으며 백성들 못잖은 수난을 겪게 된다. 선조들의 혼이 스민 역대 문화재들은 일제 강점기 때 마구잡이로 왜에 수탈당했다.  1912년 말 경주를 방문한 조선총독은 평소 조선의 유적과 유물에 관심이 지대했다.

그가 한 일본인 정원에서  생긴 불상을 보고 탐을 내자 주인이 총독 관저로 이를 올려 보낸다.

경주에 살던 재력가 도다이라 료조가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진상한다면서 서울 남산의 총독관저(중구 예장동)로 보낸 석조여래좌상.

1927년 총독 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새로 지으면서 불상도 함께 옮겨졌다.

그즈음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문서 중 당시 일본인이 남긴 경주 출장 보고서에 따르면, 이 불상은 본래 경주군 내동면 도지리(道只里)의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쓰여있다.

청와대 깊은 숲에 묻혀 비바람에 노출돼 있던 이 석불은 한동안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잊힌 채였다.

그러다 1994년 청와대 불상이 느닷없이 소환됐다.

년도부터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며 성수대교 붕괴 사고에 지존파 사건 등 여러  대형참사가 잇달아 터지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기독교 장로인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불상을 치워버린 게 화근이라는 유언비어가 세간에 돌았다.

급기야 청와대 측이 출입기자단에 불상을 공개하므로 의아심은 무마됐다.

그 이전까지 이 불상은 청와대 직원들조차  함부 접근할 수 없는 보안구역 경비초소 부근에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출입기자들도 불상을 직접 촬영할 수 없었던 셈이다.

구중궁궐에 갇혀  베일에 싸인 비밀스런 불상이었으나 청와대 개방으로 비로소 일반인에게 모습 드러낸 신라불상.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

관저로 향하는 언덕 오르다 보면 만나는, 해서체로 쓰인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이곳.

천하에서 제일가는 복 받은 땅이라는 의미가 무색하게 청와대 쥔장들마다 파란곡절도 많았다.

하긴 뉘인들 무릇 인생사 순탄만 하던가.

관저 스쳐지나 산자락 흘러내린 앞마당 에 맑게 찰랑대는 연못 거쳐 석불이 모셔진 산비알로 올라갔다.

초입부터 경사 급해 제법 숨차게 층계 디뎌가느라 주변 단풍 챙길 새도 없었다.

십여분 오르막을 딛었는데 이번엔 내리막길.

저만치 사각형 정자 지붕이 드러났다.

오운각이라 했다.

오색 나는 구름인 ‘오운’은 신선세계를 상징한다더니 오색구름 대신 오색 단풍 드리운 풍광이 가히 선경같았다.

아득히 보이는 남산타워, 조망권도 훌륭했다.

오운정 현판은 이승만 박사의 글씨체라고 한다.

정자 옆으로 바투게 연결된 계단을 굽어도니

거기에 사모하던 석상이 단청된 전각 아래 정좌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입가에 스민 천년의 미소.

풍부한 양감의 당당하고 의연한 자태, 옷깃은 부드러이 무릎을 덮었다.

그러나 아무도 찾지않는 산허리에서 홀로 찬서리 비바람 맞으며 뭇 일월 지탱했을 불상.

만고풍상 겪어내고 오늘에 이른 우리 민족사와 궤를 같이 했구나 싶어 짠하기도 하였다.

그 앞에서 잠시 예를 표하고는 오던 길 되짚어 하산하는 발걸음은 그래도 사뭇 흐뭇하면서도 가뿐했다.

밤에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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