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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Dec 23. 2024

호박지를 아시나유?


충청도 고향에서처럼 펑펑 눈 내리는 아침이다.

기상예보를 미리 체크해 둔 터라 이런 날 알맞은 일감을 마련해 뒀다.

때마침 엊그제 삼춘이 김장밭에서 거둬 온 끝물 배추 무와 함께 청둥호박 두 덩이를 갖다 준 게 있었다.  

하여 김장 뒤끝에 담그곤 한 향수 어린 호박지를 버무리기로 한 것.

제주 인심이 워낙 푼푼해 서귀포에 와서는 귤이며 채소 나누는 이웃들 정으로 거의 거저 살다시피 했다.

토종 식성임을 아는 지인들은 밭에서 직접 가꾼 호박, 가지, 상추, 부추, 얼갈이배추를 전해줬다.

덕분에 그만큼 생활비(엥겔지수)도 영 적게 들었다.

달착지근한 호박 맛과 칼칼한 양념 맛이 어우러져 김치로서는 매우 독특한 맛을 지닌 계절음식 호박지.

날씨가 썰렁해지면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영양공급을 충분히 해줘야 하고 속이 따뜻해지도록 전골류나 찌개를 끓여 먹곤 한다.

겨우내 끼니때마다 화로나 아궁이 불에 끓여서 먹곤 한 호박지는 숟가락질 분답게 만드는 찌게류로 점잖은 상차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반 서민음식이다,

좋게는 향토색이 짙다 할까, 토속적 취향이 강하다 할까.

수수하고 질박하다 못해 진짜 세련되지 않은 촌스런 음식인 호박지다.

언니가 부친 김장김치도 있지만 호박지를 담기로 한 것은 인정 어린 고향맛을 반추하기 위함이다.

생각만으로도 화롯불에 얹은 호박지 뚝배기에서 보글거리며 끓던 구수한 내음이 떠올라 군침부터 돌았다.



호박지는 중부지방 그중에도 해안가에 접해 있는 충청도와 황해도의 향토음식이다.

보통 김장하고 남은 여줄가리 배춧잎이나 무청을 그러모아 쓰므로 모양새야 과히 볼품없는 막김치다.

통상 늙은 호박김치라고도 하나 충청도에서는 호박지라 부르는데 지져먹는 김치라서 호박지라 하지 싶다.

만드는 방법은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다지는 일까지 일반 김치 담는 식과 동일하나 주재료로 청둥호박을 먹기 좋은 크기로 약간 도톰하게 썰어 넣는다는 것이 다르다.

예전엔 갓 잡은 새우, 밴댕이, 황새기, 게, 생태 등 온갖 해물이 들어가므로 영양가도 높고 무엇보다 깊은 진미가 결결에 스며들어 맛이 구수했다.

처럼 여러 부재료가 섞여야 뭉근하게 깊은 진국이 우러나는데 이번에 쓸 양념 재료는 멸치 액젓, 마늘, 생강, 대파, 고춧가루로 여느 때 깍두기 양념 준비하듯 간결했다.

지난 달력을 바닥에 깐 다음 본격적으로 호박지 만들기에 들어갔다.

먼저 김치통을 꺼내놓고 마늘 생강을 손질해 드르륵 갈고, 쪽파도 다듬어 씻어뒀다.

청둥호박은 껍질부터 벗겨 한입에 먹기 좋게 썰어 소금을 약간 쳐놓았다.

전에는 호박 속을 파내며 씨는 따로 모아서 말렸더랬는데 이 호박씨는 너무 잘아서 간수하지 않았다.

그릇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부엌, 캠핑 시나 야전 막사 같은 살림살이라 당연히 모든 게 엉성했다.

김치통을 양푼 대용으로 사용, 무 배추와 파를 썰어서 호박과 함께 양념에 고루 버무렸다.

필요한 모든 그릇이 다 있는 미국 집이 순간 아쉽게 떠오르기도 했다.

아무려나 모처럼 집안에 간간 짭조름한 풋김치 내음이 번졌다.

사실 아주 오래간만에 주부 흉내 한번 내봤다.

김치통에 반쯤 채워진 호박지를 보자 타임머신을 타고 유년의 고향에 와있는 듯.



막간에 생긴 황당한 실수도 빼놓을 수 없겠다. 

어제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배추를 절여둔다고 소금을 두 움큼 쳐두었다.

그런데 아침에 나가 보니 배추가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대체 이게 웬일이람?

세상에나!

시차로 오락가락도 하던 터라 잠에 취한 채로 찹쌀을 켜켜에 뿌려뒀지 뭔가.

미국 가기 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미니멀 라이프의 살림이나마 찬찬히 정리정돈을 해뒀다.

그때 천일염 봉투와 찹쌀 봉투 자리가 바뀐 걸 모른 채 어둠 속에서 무심코 꺼내 뿌린 것이 찹쌀이었다.

타성에 길들어버린 탓인가, 엉터리로 부엌살림을 해온 티인가.

아무리 잠결이라 해도 그렇지 소금과 찹쌀 감촉은 전혀 다르건만 착각도 유분수다.

혼자였기 망정이지 누가 봤다면 치매 의심이 들었을 테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튼 배추에 뿌린 찹쌀을 털어내고 다시 간소금을 친 다음 손이 많이 가는 호박을 다듬었다.

살이 두툼하고 황금색으로 잘 익은 청둥호박은 늙을수록 당질의 함량이 높아진다고 한다.

호박에는 신경완화 작용을 하는 비타민B12가 들어 있어서 불면증에 도움을 주며 비타민A, B2, C가 듬뿍 들어 있으므로 감기 예방에 특효란다.

또한 노화 방지에 효과적인 비타민E와 카로틴이 풍부해서 고운 피부를 만드는데도 일조를 한다고.  

늙은 호박은 애호박보다도 식이섬유, 철분, 칼륨, 카로틴이 풍부하며 칼슘은 단호박보다 약 7배, 철분은 단호박과 애호박보다 2배가량 많이 함유하고 있는 건강식품이다. 

청둥호박의 당분은 소화 흡수가 잘 되면서도 당뇨나 비만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니 기특도 하다.  

다만 고혈압이나 간질환으로 이뇨제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좋지가 않다니 주의가 필요하다고.

임도 보고 뽕도 딴다듯 베타카로틴의 보고라는 늙은 호박으로 고향의 맛을 즐기면서 한편으로는 면역력 강화에다 항산화 효과며 눈 질환 예방 효과까지 볼 수 있다니 그야말로 다다익선 아니랴.

밖은 여전히 성성한 눈발 휘날리다가 잦아들기도 하는 등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날씨다.

섶섬이 떴다 사라졌다 하는 창밖 풍경, 서귀포의 눈이지만 허공에서 춤추며 자욱이 쏟아지는 눈발은 유년의 충청도에서 본 풍경과 마찬가지라 유정스럽다.

오늘은 눈이 종일토록 흐벅지게 내릴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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