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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메오름, 눈 맛 시원하기 그지없는

by 무량화


한라산 웅자 명징하게 드러나 있다.

이런 날은 바다와 산을 동시에 아우르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굴메오름은 다시 한번은 걸어보려 별렀던 코스다.

길동무와 걷기로 한 군산오름은 안덕면 창천리에 위치했으나 예래마을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봉긋한 동산 위에 곰인형 귀처럼 생긴 돌출부가 어찌 보면 부엉이 귀깃 같이 귀여운, 양 봉우리를 이고 있는 군산(軍山), 군뫼, 굴메로 불리는 원추형의 이 오름.

특히 군산의 자랑인 장엄 일출과 일몰에다 화려한 야경까지 아우르는 오름 명소다.

차를 타고 오르면 약 오분 정도만 걸어도 정상에 도달할 수 있기에 많은 이들이 찾는 군산이다.

그러나 제주 내 오름 중에서 면적 가장 넓은 군산오름이라, 맨 처음 무턱대고 올랐다가 발품깨나 팔았다.

335m 정도의 높이라 만만히 여겼다가, 걷고 걷고 또 걸어 당시 지치다 못해 진력을 냈던 산행이었다.

그때 질려 두 번 다시 거들떠도 안 봤는데, 오가며 먼발치로 보이는 그 산은 자꾸만 아는 체하며 손짓했다.

논짓물에서부터 군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걷던 지난번과 달리, 정상의 측면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군산으로 향하는 어름에는 벌써 수선화와 애기동백 피어나 반가웠다.

전형적인 제주 올레 돌담도 구경하며 동네 고샅길 걸어 군산 산책로에 이르렀다.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 따라 걷노라니 호젓한 대숲길도 나오고 솔밭 사이로 난 오솔길도 반겨주었다.

그런가 하면 산자락 여기저기 오후 햇살에 하얗게 나부끼는 억새 지천이었다.

눈 맛 시원할 정도로 아주 청량한 날씨, 겨울답지 않게 바람도 부드러웠다.



처음 대평마을에 갔을 적이다.

곰인형 귀처럼 산봉우리가 둘인 귀여운 군산을 보고 무작정 올라가 보기로 했다.

당시 이 산을 오를 때는 산지물에서부터 시작했다.

마을길, 언덕길, 산길을 꾸역꾸역 지치도록 걸어야 했다.

신꼭대기 뿔바위에 잠깐 섰다가 서쪽으로 한참 기운 태양 각도에 놀라 허겁지겁 반대편 산길로 내려왔다.

그러나 웬걸! 봉긋한 동산 같던 산은 도무지 끝도 없었다.

만용이었다.

군산에 대한 검색을 해보니 제주 오름 중에 가장 면적이 넓은 곳이 여기였다.

따라서 오르는 길도 내려오는 길도 여기저기로 나있었다.

그처럼 오름 가운데서도 걸출한 오름의 맹주임을 뒤늦게 안 것.

반면 차를 이용하면 정상까지 오분만 걸어도 닿을 수 있는 산이기도 했다.

360도로 탁 트인 산정 뷰가 끝내준다더니 이날은 시계도 확 트여 있었다.

조망권에다 일출과 낙조의 명소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가족끼리 놀러 온 젊은이가 대평뜰까지 간다고 하자 차를 태워준 덕에 어둡기 전에 겨우 하산을 했더랬다.

위치 정보도 옳게 파악하기 전의 무모한 산행이었다.

그 후 정면, 양 측면, 후면은 물론 월라봉 통해서도 사방으로 공략해 본 군산이다.

일제 진지동굴이며 사자암, 눈썹바위, 금장지, 애기업게돌 등 군산 곳곳에 찾아볼 거리도 많았다.



산길 오르다가 잠깐 멈춰 서면 한라산과 마주하기 일쑤였다.

의연한 자태 한라산은 구름 거느리고 신선도를 그리는 중이다.

제주 사방 어디에서도 우러르게 되는 산중의 산 한라산은 제주 그 자체다.

이처럼 한낮임에도 한라산 자태 명료하게 드러내기 쉽지 않은데 백록담까지 육안으로 또렷이 보인다.

한라산 자락에 울멍줄멍 솟은 380여 개의 오름들.

오름 중 가장 높은 곳은 산방산이며 두 번째가 군산, 출입이 가능한 오름으로 치자면 가장 높은 오름답다.

뿔바위가 선 정상에 오르자 사방 천지 조망권 탁 트여 일망무제 뜻 그대로 눈 맛 시원스러웠다.

돌올하게 솟은 산방산은 잘 생긴 한 덩어리 수석이다.

산방산이 우뚝 무게중심을 잡자 월라봉과 박수기정은 짐짓 엎드려 낮게 부복자세를 취해준다.

바로 건너면 단산 바굼지오름과 모슬봉 나란히 이웃하고 서쪽으로 대병악 소병악을 시작으로 뭇 오름들이 실루엣 곱게 떠오른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한 폭의 풍경화는 한라산 그 발치 해안선 두루 아우른 채 마라도를 비롯 송악산,

형제섬, 가파도가 한눈에 든다.

산정 가까워지자 수시로 접하게 되는 한라산, 전면 난드르 바다는 은쟁반같이 뽀얗게 빛났고 박수기정

수직절벽도 선연했다.

그뿐인가.

동쪽으로 시선 돌리자 아하! 너로구나!

낯익은 서귀포 앞바다에 뜬 범섬 문섬 섶섬 차례로 얼굴 내밀고 강정항 법환포구는 청푸른 바다 배경이라 몹시도 새하얗다.

혁신도시 랜드마크인 월드컵경기장 하얀 나래는 곧 비상할 듯, 중문 관광단지며 예래마을 정경 그림 같다.

전망터로 따지자면 과연 조망권의 끝판왕이다.



다들 침묵 속에서 그저 하염없이 산을, 바다를, 들판을, 바라보며 각자 상념에 잠겨있다.

이만큼도 높이라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 도시조차 미니어처 모형물보다 작디작다.

모래알 정도도 못 되는 인간사, 얽히고설켜 오늘도 서로 지지고 볶는다.

국가 간의 전쟁도, 나라안의 정쟁도 무슨 철천지원한 사무쳐 극단으로 치닫는지.

갈등 구조라도 만들어야 씹는 재미있어서인가.

제풀에 과열된 양극단의 열혈 전사 열 식힐 처방전은 없는 걸까.

두서없이 떠오르는 강퍅진 세상 잡사 머리 흔들어 털어냈다.

심호흡 서너 번으로 마음자리 환기시키고 산정에서 내려와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금장지를 지나자 내리막길이라 층계로 다듬어진 편안한 길도 나오고 솔잎 누렇게 깔린 흙길도 기다렸다.

곧이어 잡목 뒤집어쓴 채 웅크린 사자암, 연달아 진지동굴이 모습을 보였다.

애기업게돌, 미륵돌, 구시물 등은 다음번에 넉넉한 여유를 갖고 찾아보기로 하고 미련없이 돌아선다.

점점 짧아지는 낮시간, 다섯 시만 돼도 산속엔 어스름이 깃든다.

안덕 방향으로 길을 잡고 숲 속 올레길 표식 따라 걷노라니 마닐라삼 매트가 죽 깔린 편한 인도가 나온다.

내려오는 길은 완만해서 걷기도 편하고 널찍한 길이라 휘휘하지 않아 좋다.

저 아래는 안덕 화순 대정, 차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영구물만 지나면 마을길, 온데 귤밭이라 금빛으로 익어가는 감귤 위로 한라산이 무뜩 들어선다.

차도가 점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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