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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 산록 설경 방문

by 무량화


지난해 어느 섣달.


제주 산간지역에 대설특보가 발효됐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밤새 눈이 내릴 거라며 외출을 자제하라는 안전 문자가 계속 떴다.

줄곧 하늘 가득 무거운 구름장 드리운 걸 보았기에 은근 천백도로 설경이 걸기대 됐었다.

날씨만 음산할 뿐 눈은 내리지 않았으나 이틀째 현관 밖에도 나가지 않고 조신하게 은거 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내렸고 기온은 7/2도를 가리켰다.

창 가득 펄펄 휘날리는 눈발 그윽이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눈을 보러 중산간에 올라가는데 동행하겠느냐고 도반이 물었다.

설경 구경하러 인파 몰리는 천백도로나 오일육 도로가 폐쇄된 터라 차를 가지고 가까운 숲에 오르기로 했다는 것.

추억의 숲길로 해서 치유의 숲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세 시간 여가 소요되는 눈길 트레킹이었다.



산록도로 솔오름 전망대 제쳐두고 십분 여를 달리면 추억의 숲길 입구다.

한라산 산록 둘레길과 이어지는 고지라 인근에는 백설 소담스레 쌓여있었다.

그때부터 입이 절로 벙그러졌다.

이게 웬 특혜인가, 생각지 않게 의외의 선물을 받은 기쁨에 들떠 눈길로 서둘러 들어섰다.

추억의 숲길은 접근성이 좋은 데다 자연 그대로의 구불구불한 숲길 걸으며 삼나무 군락지를 거쳐 편백숲이며 동백숲도 지난다.

동백은 토종 동백으로 둥치 굵고 키가 큰 거목들이라 꽃을 찍으려면 망원렌즈로 땡기지 않고는 담기조차 어려웠다.

걷는 동안 조선시대 관영목장의 경계 돌담인 잣성이 더러는 무너진 채로 군데군데 곁을 호위하고 계곡이 가끔 드러나기도 했다.

한때 모둠살이를 했던 촌락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말방아터와 사농바치터를 비롯 옛 집터도 나타났다.

사냥꾼 터를 지나면 추억의 숲길은 다정하게 한라산 둘레길과 겹쳐졌다.

속속 안전문자를 띄워대며 외출 자제를 당부하더니 그래서인지 산길은 호젓할 정도로 텅 빈 채 적요했다.

그 덕에 우리는 겨울 산행의 묘미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적설기 등반의 참맛은 아무도 딛지 않은 순백의 눈길에 발자국 내가며 개척자처럼 척척 걷는 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두툼히 쌓인 눈 아래는 거의 돌팍길, 헬레나 씨 부군이 앞장서서 길을 터주면 우리는 발자국대로 따랐다.


사실 그분이 동행했기 망정이지 여자끼리 오르기에는 휘휘하기도 한 데다 먹이 찾아 내려온 산짐승도 있어 아무래도 무리였다.

한라산 자락인 산간이라 옷 겹겹 껴입고 왔으나 원래 눈 오는 날은 날씨 온화한 편, 산길 조금 걸었는데도 등에 땀이 찼다.



산간의 기상상태는 변화무쌍, 파란 하늘이 보이는듯싶다가도 금세 눈 고래질을 쳐댔다.

그때마다 시야는 눈보라로 뿌예졌고 동백잎이며 바위 위에는 눈 푸덕지게 쌓여갔다.

겉옷과 장갑은 그새 눈에 젖어 축축해졌으므로 옷 한 겹 벗어 백팩에 넣고 장갑도 바꿔 꼈다.

눈에 푹푹 빠져 등산화를 신었어도 발에 눈이 들어가 이미 양말 바닥은 눅진한 상태.

아이젠은 골짜기 돌팍길 걷는 동안 언제 빠진 줄도 모르고 양쪽 다 사라진 지 오래다.

편백숲 쉼터에서 따끈한 컵라면으로 속을 덥혔지만 삼나무 숲을 거칠 즈음은 아마 해발 8백 미터 급 되는 듯 안면이 시렸다.

신선한 내음 뿜는 편백나무 향 못잖게 청량한 태곳적 고요 품은 설향을 숨 깊이 들이키며 음미해서인지 코끝 몹시 아렸다.

삼나무 숲에서부터는 온 길 되짚어 내려가는 대신 비교적 길 널찍한 치유의 숲길로 접어들어 하산을 했다.

눈보라로 조난당할 일이야 없겠지만 점점 눈발 자욱해져 시간도 단축되는 안전한 길을 택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시각은 오후 세시 반 무렵, 어느새 산록도로 찻길은 빙판길 될 조짐이 보였으므로.

자다가 떡 얻어먹는다더니 생각잖게 설경 방문길에 초대받은 고마움에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들 젖은 발 꿉꿉하다 보니 나부터 집 앞에 내려주고 귀가를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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