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잎 피어나 녹음 무성한 다음 드디어 낙엽으로 이울듯, 우리 역시 우주의 질서인 生成異滅은 거역할 수 없는 일.
나이 들수록 눈가에 흩뿌려지는 실낱, 이마에 일렁이는 잔물결, 이를 그 누가 막거나 거둘 수 있을까.
자연적인 그래서 아주 당연한 세포의 노화현상을 한사코 마다하며, 여인들은 매끈하고 탄력있는 피부를 오래도록 유지하려 안간힘을 쓴다.
세월 속에 옅고 깊게 파인 이 흔적들을 성형술에 의존해 깜쪽같이 지우기도 하고 화장술로 교묘히 감추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뛰어난 미용술이나 솜씨 좋은 화장술로도 위장되지 않는 곳이 있다.
손이다.
손은 기껏해야 마사지 정도를 해줄까?
언젠가는 손까지도 성형하는 시대가 올지 모르지만 아직은 파운데이션으로 떡칠 화장을 할 수도, 아이라인 그리듯 윤곽 돋보이게 할 수도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어느 곳보다 제일 먼저 손이 정직하게 나이를 알려준다
날렵하니 곱던 손.
섬섬옥수는 아니었다 해도 이처럼 마디 앙바라지진 않았던 손이었다.
무턱대고 뻣뻣하지만도 않았던 내 손이었다.
그런데 얼굴보다 더 자주 대하게 되는 손이 왠지 자꾸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무심히 척 느려진 손을 보노라면 내 손이지만 정나미가 떨어진다.
푸르게 드러나는 심줄에 윤기마저 잃은 꺼칠함으로 그만 내 손 같지가 않아 진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결혼 전에는 학교 나와 곧바로 직장 다니며 일다운 일을 해볼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엄마는 여식이지만 내게 부엌일이든 빨래든 거친 일은 통 시키지 않았다.
모든 일을 당신이 서둘러 해내시기는 우리 집에 잠시 다니러 오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평소 일 못 배워 곤란 당하지도 않았으니 누구든 일이란 닥치면 다 추슬러 내게 마련 아니던가.
결혼 이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얼마나 많은 일을 주관해 온 손인지 모른다.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한만큼 혹사만 당해온 손이다.
그래서일까.
나이를 제일 먼저 먹어버린 손.
새삼스레 손 안팎을 연민으로 쓰다듬어 본다.
오늘따라 잔손금이 도드라져 거미줄로 얽힌 손바닥.
다시 손을 힘껏 펴본다.
중간 마디가 위로 제쳐지니 마치 새의 날갯짓이듯 비상하는 자세가 된다.
당당하면서도 얼마쯤 도전적인 위세는 메이플라워를 탄 청교도들의 프런티어 정신 같다.
그뿐인가. 손목에서 시작하여 점점 부채꼴로 퍼져나가는 손 모양은 무한대의 우주를 지향하는 인간의 이상.
다섯 개의 손가락은 오대양으로 뻗어나가는 인간의 끝없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리.
이 손으로 이루지 못할 일이란 없을 것 같다.
나폴레옹처럼 큰 키 아니나 다부진 맵시가 믿음직스러운 엄지는 으뜸을 뜻한다.
그다음 검지는 노고를 치하하고 싶은 산업의 선봉장.
내 손가락 중 유독 뒤로 착 제켜져 재주 있겠다 소릴 듣게 하는 둘째다.
조화와 균형을 고루 생각하며 의연히 서서 중앙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우뚝한 장지.
우리 집 맏이처럼 든든하고 훤칠한 게 이 장지다.
약지는 내 손가락 중에서 제일 미모다.
거기다 사시장철 반지로 호사를 하고 더불어 빛나는 넷째.
막내인 새끼손가락.
변방을 지키는 남이장군이었을까.
손의 외곽을 마무리 지으며 나직이 몸 낮춘 채 겸손한 小指.
이들 다섯이 독자적으로 또는 힘을 합하여 모든 일을 처리한다.
아주 빈틈없이 보조를 잘 맞추어 일을 해낸다.
어느 하나 임무에 소홀하거나 딴전 피우며 게으르지 않다.
글씨를 쓸 때 장지는 받침 되고 엄지는 조여주고 검지는 밀어준다.
그 나머지는 일사불란하게 장지를 보필한다.
빨래할 적엔 열 손가락 모두에 팔 힘까지 가세시킨다.
참기름 깨소금에 식초 약간 쳐 나물 무칠 때엔 조물조물 다섯 손가락이 경쾌하게 율동을 한다.
덩치에 비해 유달리 손이 크고 손가락이 길다.
옛말에 손가락 긴 사람치고 게으르지 않은 이 없다 했는데 그럴싸하다.
손이 크면 잘 산다는 말이 있듯, 모든 일을 다루는 손이 크면 복 역시 크게 들어오는 게 아닌가 싶다.
큰손이란 증권가에서 큰돈 주무르는 사람이 아니라 도량이 넓고 원만하며 남에게 넉넉히 베풀 줄 알고 매사 옹졸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또한 손끝이 야물다 하면 알뜰하고 솜씨 좋고 살림 잘하는 여인에게 이르는 찬사다.
또한 손은 감정 표현의 대행자이기도 하다.
기쁜 일에는 손뼉을 치고 잘못했을 때는 두 손을 마주 비빈다.
겸연쩍은 경우 괜스레 손을 만지작거리고 화가 나면 무언가에 도전하듯 벽이고 책상이고 쾅 내려친다.
환호는 두 손을 흔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게다가 눈을 잃은 사람에게 눈이 되어 주는 게 손이다.
말을 잃은 이에게 말 대역이 되는 것 역시 손이다.
그리하여 점자가 나오고 수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따지고 보면 손의 역할은 참으로 무궁하기 그지없다.
문화도, 산업도 무릇 그 모든 역사는 손에서 비롯되는 것.
그러나 손도 머리의 조정이 없으면 제멋대로 사고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
함부로 남의 것을 탐내 손대거나 남을 해치는 일도 손이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유능한 의사의 손이 뭇 생명을 지키고 훌륭한 예술가의 손은 불멸의 기쁨을 창조해 낸다.
해서 언제나 렘브란트며 고갱의 그림 앞에 서면 그 손의 위대함에 전율한다.
물론 빛나는 영혼이 이룬 결과이지만.
뿐만 아니다.
인간을 빚은 것은 신의 손이었다.
나아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의 하나로 꼽는 게 손 사용 여부다.
글다운 글도 못쓰면서 여전히 펜을 굴리는 지금이나 또 쉴 새 없이 물에 젖고 바삐 움직이며 일을 추려내는 손.
그러면서도 정작 노고에 비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손.
마치, 수출입국의 화려한 포부를 가꿀 수 있게 한 원동력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해온 공장 근로자처럼 손은 가려진 그늘에서 수고할 뿐이다.
손 역시 외양의 생김생김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가 소중한 것은 그의 역할 때문이듯이.
그가 묵묵히 자기 소임에 최선을 다하며 헌신하는 모습에서 거룩함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백옥같이 고운 피부에 명주비단처럼 살가운 촉감 지닌 어여쁜 손이 아니면 어떠랴.
자기 몫의 삶에 열심이며 맡은 일 성실히 해내는 손이라면 긍지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더하여 밤늦은 시각 자기 성찰의 일기를 적을 줄 아는 손, 새벽녘 淨한 마음으로 기도를 바칠 줄 아는 손에서는 절로 아름다움이 우러나리라.
나이 든 만큼 적당히 거칠어지고 마디 굵어져
얼굴보다 먼저 나이를 짐작케 하는 손도 이젠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내 삶의 표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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