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남빛 하늘이 하도 눈부셔 도반을 불러냈다.
이번엔 따뜻한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고망난돌에서 차를 버리고 맞은편 해변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신천 바다목장에서 진피 말리는 이색 진 풍광도 만날 겸 올레 3코스를 걸어볼 생각이었다.
지명대로 바닷가에 구멍 뚫린 돌, 기이한 형태의 현무암 기다리고 있는 곳.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휘몰아치는 해풍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해변에 이르자 나쯤이야 거뜬히 날려버릴 듯 바람이 거칠게 불어댔다.
발걸음 옮길 적마다 거의 고꾸라질듯해 겨우겨우 중심 잡아 몸을 지탱해 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강풍을 대비해 진작 감귤 껍질 말리는 방수천막은
둘둘 말아 접어뒀으며 올레꾼들은 잔뜩 웅크린 채 걷고 있었다.
따뜻한 집 놔두고 자청해서 고생하는 우리 같은 동지들, 언덕 아래 아늑한 자리나 큰 바위 바람막이 삼아 웅크린 채 강픙을 피했다.
바닷가로 내려서자 망부석처럼 서있는 검은 바위들 중에는 구멍 난 돌도 있긴 있다.
어떤 바위 형상은 마치 무거운 등짐에 짓눌린 곤고한 인생길에서 삶의 짐 잠시 부려놓고 먼 수평선 망연히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
서귀포 서쪽에 있는 모슬포를 두고 고약한 이명(異名)이 따른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이 살기 어렵게 세찬 바람 부는 곳이라 해서 몹쓸포라느니 못살포라고도 한다더니만 표선 신천 바다도 그에 못지않았다.
바람 때문인지 바닷가에는 도통 나무 다운 나무가 자리 잡지를 못했다.
방풍림 조성조차 어려운 지형인 듯 오로지 해안가엔 군락 이룬 우묵사스레피만 언덕에 뒤덮여 있었다.
난대성 상록관목인 우묵사스레피는 섬쥐똥나무라고도 불리며 서귀포와 경남 전남의 바닷가에서 자라는 나무다.
자잘한 잎새는 오목하면서 타원형이나 이름 비슷한 사스레피의 잎 끝은 뾰족해 사촌지간에도 이처럼 모양 다르다.
빳빳하니 야무지게 생긴 모습과는 달리 성정은 한량없이 유한 듯 더 이상 낮출 수 없을 만치 한껏 몸을 낮췄다.
한사코 거세게 몰아대는 완강한 바람의 폭거에 순응하지 않으면 버텨낼 재간이 없음을 진작에 간파한 나무.
하늘 향해 똑바로 자랄 수 없는 숙명을 받아들여 대지에 바짝 엎드린 채 바닥 기다시피 하는 우묵사스레피가 연민스러웠다
.
순리대로 사는 법을 체득한 것일까 아니면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대한 무조건적 굴종이 체질화된 것인가.
우묵사스레피 줄기끼리 서로서로 어깨 결어 조밀하게 스크럼을 짜고서도 왜 프랑스 혁명군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지.
무리의 힘, 다수의 힘에 기대기보다는 온전히 하늘의 섭리에 따르는 길을 택한 것이 어쩌면 참 지혜일지도 모른다만.
군락지 사이로 나있는 올레길 따라 걸으며 내려다본 바닷가.
들쭉날쭉한 해암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가마우지도 강풍 기세에 쫄아든 듯 석상이듯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 등지고 걸어볼 심산으로 표선 쪽으로 내려가자 했더니 도반이 말렸다.
신천 바다목장 지나서부터는 규모 큰 양어장이 이어지며 후미진 길이 된다면서.
올레길 구간 중 위험한 곳은 우리끼리 걷는 건 절대 사양, 게다가 춥기도 오지게 추웠다.
점점 더 바람결 드세지며 구름장 몰려들어 날씨 험해지기에 그쯤에서 우리는 퇴각하기로 했다.
후드끼는 바람에 쫓겨 저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속보를 넘어 달리기 하듯 재빠르게 한길로 나와 차에 올랐다.
올레길 나섰다가 중도작파하고 이처럼 일찍 귀갓길에 들기도 첨이라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내 거처로 와 따끈한 대추차 앞에 두고 오후 시간 느긋하게 즐겼다.
왜일까?
가만히 앉아 책 한 페이지 읽을새 없이 허구한 날 걷기에 그리도 매몰돼 있었던 걸까.
건강하다는 증표이긴 하지만 이 또한 일종의 중독에 속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