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경보가 내리더니 서귀포 시내까지 눈이 하얗게 쌓였다.
오전만 해도 눈보라가 휘날렸다.
연신 노약자들은 외출을 삼가라는 안내문자가 떴다.
굴속에서 동면에 든 곰처럼 칩거한 채 가끔 창밖만 내다봤다.
점심때쯤 하늘이 트이기 시작했다.
해가 나자 기온도 5도까지 올라갔다.
먼데는 엄두가 안 나지만 가까운 시내 공원이야 걸을만하겠다 싶어 우선 걸매공원 매화원으로 향했다.
걸매공원, 걸매란 제주어는 갈라진 대지 사이에 항시 물이 고여있는 습지로 여기에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서귀포에서 가장 먼저 매화가 피는 걸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입구에 들어서자 바로 옆 축구장에서 아이들 함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봄을 일깨우는 청량한 새소리처럼 들렸다.
청소년들의 큰 대회인 듯 열띤 응원전도 펼쳐졌다.
그 뜨거운 열기로 매화 꽃봉오리도 열릴 듯했다.
주변에는 비파나무꽃이 솜털에 싸인채 피어있었고 멀구슬나무는 노란 구슬 같은 열매를 총총 달고 있었다.
매화원에 닿았다.
예상 밖이었다.
입을 꼭 다문 매화 봉오리는 녹두알만큼 잘았다.
나무마다 샅샅이 살피며 어렵사리 찾아 헤맨 끝에 겨우 몇 개 만난 청매는 흰 속살 보일락 말락.
정월 대보름이나 되어야 매화밭 볼만하겠네, 너무 서둘렀군.
연미천이 보이는 차길 건너 시공원 안 작가의 산책길로 방향을 잡았다.
이번 목적지는 시공원 내에 조성된, 이름하여 한일우호친선 매화공원이다.
걷는 동안 그새 날씨가 변덕을 부려 눈발 휘날렸다.
무거운 구름층이 지나며 짐짓 장난스럽게 짐을 덜어내는 모양이었다.
매화밭에서 설중매라도 보여줄 참인가, 은근 기대가 됐다.
시공원답게 곳곳에 시비가 서있는 길, 대숲과 송림 위로 흰눈이 춤을 추며 날아다녔다.
전망대와 파고라연못을 지나 고작 몇 발짝 옮긴 잠깐 사이.
햇살 쨍해지자 순식간에 바뀐 뮤지컬 무대처럼 눈발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천지연폭포와 함께 한라산을 조망하기 더없이 좋은 장소이나 요 며칠 한라산은 자취 가뭇없어졌으니.
천혜의 비경을 다수 품은 서귀포다.
칠십리 시공원에 오르며 칠십리라는 단어가 아마도 서귀포 해안선의 길이가 아니겠나 싶었다.
서귀포 칠십리에 물안개 곱다느니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진다는 노래 가사도 있다시피 바닷가 풍광과 연관 있으니까.
그러나 정확히 알고 싶다면 당장 구글링하면 해결될 일.
검색 결과 해안선 길이가 아니었다.
서귀포 칠십리(西歸浦 七十里)란 조선시대 당시 현청이 있던 표선면 성읍마을 관문에서 서귀포 포구까지의 거리를 이른다고.
지금은 신비로운 서귀포의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상징어로 통한다.
서귀포 앞바다에는 범섬[虎島], 섶섬[三島], 문섬(文島), 새섬, 지귀도 등이 떠있고 서귀포항이 열려있다.
뭍 안쪽에는 천지연과 정방폭포가 있으며 주변 밀밀한 상록수림에는 감탕나무와 담팔수나무 자생하고 있다.
서귀포 칠십리 시공원은 서귀포시 서홍동 천지연폭포 서남쪽 언덕을 끼고 조성되었다.
특히 서귀포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경관이 제주 그 어느 곳보다 훌륭하다고 알려진 바로 그 지점이다.
걸매공원보다 양지바른 장소라서 그런지 여기는 매화송이가 한껏 부풀어 콩알만 한 크기였다.
그래도 개화까지는 아직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 주쯤이면 벙글어진 매화를 만날 수 있을까.
하긴 날씨가 푹해지며 기온이 올라가면 금방 매화는 폭죽 터지듯 피어날 터.
산책 나온 한 가족이 아쉬운 듯 매화나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중섭공원에 가면 홍매 지금 볼만해요.
정말요? 부인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매화공원을 지나 문화공간 스페이스 70에 들러 서귀포를 소재로 한 사진전 구경을 했다.
문화탐방 영상으로 산방산 돌인 조면암을 사용해 평생 끌질을 했던 비석장 스토리도 시청하였다.
자녀들 학사모 번듯하게 쓴 사진을 자랑하며 여한없이 살았다고 뿌듯해하는 한 가장의 모습이 훈훈했다.
유명시인의 시비들 시나브로 사진에 담아 가며 출구로 나왔다.
청청한 대나무밭 아래 파초일엽 이파리들이 환송을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