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걸핏하면 말없음표를 끌어온다. 이처럼 가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하는 상황들. 그때마다 애매하니 멋쩍은 표정이 얼핏 스쳤을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옳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 데다 대꾸할 말을 즉각 만들어(찾아, 가 아니다) 내지 못하는 답답함을 겪기가 다반사이다보니 영어가 웬수만 같다. 미국에 산지 십 년 가까이 되건만 영어가 여전히 한심스런 수준인 까닭이다. 유창한 언어로 자유자재 의사소통이 원활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좌절까지는 아니라도 창피하고 치사스런 기분 들 적이 한두 번 아니다. 그나마 나이 덕에 뱃장 좋게 버틴다. 아니 그 나이가 장애요소이기도 하다.
언어장벽은 나에게 난공불락의 성벽인가. 아닐 것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산이 없다 했거늘. 각오만 다지면 충분히 정복할 수 있는 영어다. 다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절박한 입장이 아니었다느니 이것저것 핑계를 대고 변명을 달며 여지껏의 세월을 방만히 지내온 우유부단이 문제였다. 장대를 찾아들고 감을 딸 생각은 안 했다. 그냥 감나무 아래 서서 입만 벌리고 기다렸다. 어느 순간 저절로 말문이 트이는 신통방통한 기적이 생길 거라며.
정글에서 짐승과 함께 길러진 늑대소년이 있었다. 인간의 언어 대신 울부짖음에 가까운 늑대소리로 감정을 표현했다. 하는 짓도 동물 그 자체였다. 직립 보행이 아니라 네 발로 겅중거리며 뛰어다녔다. 문명세계와 단절된 밀림 속에서 자라난 소년은 사람이되 야생동물 그대로였다. 이처럼 전적으로 주위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가 인간인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성 싶다. 영어가 필수적인 입장에 놓여있으니 직접적인 영향권에 속해있는 셈인데도 매양 제자리걸음인 채 신통찮은 영어 실력. 현실 적응력이 떨어지는 데다 배우고자 하는 열의도 부족하다. 결국 두드리지도 않고 문이 열리기만 기다려온 셈이다.
집 밖에 나서면 거의 미국인과 만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말이 트이지 않아 툭하면 바디랭귀지가 동원되곤 한다. 영어소설을 번역할 수준의 하루끼가 말하는 <슬픈 외국어>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씁쓸다못해 서글픈 기분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다. 잠깐 스쳐 지나는 여행객도 아니면서 이건 정녕 아니다 싶어 슬슬 영어 정복의 묘수가 없나, 두리번거려 본다. 장벽을 허물려면 불도저를 불러야 할 것이다. 감을 따려면 장대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길을 가늠해 보려면 지도를 펼쳐야 할 것이다. 닫힌 문을 열고자 하면 적극적으로 밀어보거나 두드려봐아 할 것이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생각이 중요하다고 하듯 나는 할 수 있다, 강하게 자기최면을 건다. 마인드 컨트롤 지침서대로 내부 수신기도 가동시킨다. 필요로 하는 정보에 마음을 열어두는 하나의 방법론을 차용해 보는 것이다. 흡수해 들일 수 있는 영어에 관한 정보에다 채널을 맞춰 적용해보기 시작한다. 거의 안 보던 텔레비전을 켜두고 별반 신용 안 하던 회화 테이프도 챙기고 영어교실이 열리는 야학당도 기웃거린다. 금방 신통스런 진전을 기대하진 않는다. 그래도 혹시나 지름길이 있나 싶어 여기저기 귀를 기울인다.
누구는 무조건 단어를 외우라고 귀띔한다. 그러나 죽자고 단어만 외운다 해도 소용없다. 나처럼 나이가 많다 보면 기억에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가 쉬 잊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단어 암기보다 문맥 안에서 그 단어가 스스로 설명되는 예문을 읽으라고 누군가는 조언한다. 즉 다른 단어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면 그때서야 완전한 감각이 살아나게 되므로 관계 속의 의미, 관계 속의 감각을 예문을 통해 익히라는 말이다. 영어를 배우는데 필요한 가장 작은 학습단위는 단어가 아니라 예문이라는 말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기실 모든 공부가 그러하듯 영어를 배우는 데 왕도가 따로 없고 꾸준한 노력과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할 뿐이다.
외사촌네 쌍둥이 손주들이 어느날부터인가 저희끼리 놀 때는 영어로만 주고받는다. 조부모와 함께 살며 한국말만 쓰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다. 만 세 살이니 아직 학교도 다니기 전이다. 그럼에도 저절로 영어를 구사한다. 신기한 노릇이다. 영어공부를 따로 시킨 것도 아니고 만화영화나 본 정도다. 따라서 쌍둥이들은 환경에 의한, 학습에 의한 영어 습득이 아닌 셈이다. 유아들이 엄마, 맘마라는 첫 말마디를 떼어놓는 것이 애써 가르친 결과가 아닌 경이로운 섭리이듯이.
갓 태어난 아기가 본능적으로 엄마 젖을 힘차게 빨듯, 바다거북이 알에서 부화하자마자 쏜살같이 물가로 내닫듯,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자마자 삐약거리듯. 이 모든 것은 신비스러운 섭리의 조화다. 누가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아도 생래적으로 타고난 본능처럼 저절로 되는 일들일까. 스펀지가 수분을 흡수해 들이듯 빠르게 발전하는 꼬맹이들의 신통한 말 트임을 지켜보면서 얼핏 스친 생각, 그래 아이처럼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해보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