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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달을 기다리며

1982

by 무량화


새벽 안갯속을 휘돌아 무한 공간으로 스러지는 종소리.


그 긴 여운처럼 가슴에 은은히 남아있는 어릴 적 고운 추억들이 누구에게나 간직되어 있으리라.




내 고향 겨울은 많은 눈 쌓여 그 무게에 청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산골짝 쩡하게 울리며 깊어갔다.


하얀 적막이 깔린 겨울 끝자락에 마련된 빛의 축제이던 대보름날의 민속은 아주 다채로웠다.


이젠 다시 그 고유의 정취에 젖어 볼 수 없는 전설 같은 얘기들.


설이 지나고 대보름까진 산자며 곶감이며를 갈무리해 놓으시고 달콤한 맛을 쥐여주시던 할머니.


그분도 오래전 별빛 되어 떠나셨듯이.... 그리운 것들은 모두 다 별이 되었다.



아이들은 삼동 내내 하늘 높이 연 날리며 추위를 띄워 보냈는가 하면 씽씽 팽이 치며 겨울을 감아 보냈다.


그뿐 아니라 꽝꽝 언 방죽에서 미끄럼 타고 덩더꿍 널뛰기도 얼마나 신바람을 일으켰던가.


특히 동네 빈터에다 가마니를 깔아놓고 왁자하니 판을 벌이는 윷놀이는 이웃들과 친선을 도모하는 화합의 자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대보름을 맞으면 달맞이, 불꽃놀이가 또 얼마나 마음 들뜨게 했는지 모른다.



보름이 가까워지면 엄마는 안방 문설주 위에 생대나무 빛이 채 가시지 않은 대조리 한 쌍을 엇갈리게 매달았다.


그 안에다 성냥과 엿을 가득 담아두고 정성스레 한 해 동안의 복을 빌었다.


기원이 담긴 대조리는 일 년 내내 그렇게 방문 앞에 걸려있었다.


복조리는 마치 아기 낳은 집에 친 금줄 같기도 했고 장 항아리에 걸쳐진 새끼줄과 청솔가지처럼 잡귀의 범접을 막아 집안을 지키는 호신용 부적 같았다.




대보름 아침엔 눈뜨자마자 밤, 호두, 잣 등 부럼을 깨게 하고 좋은 소리만 들으라며 엄마는 귀밝이술도 한 모금 마시게 했다.


집집마다 색스럽고 푸짐한 오곡밥에 아홉가지 나물 무치는 참기름 내가 고소히 감돌 즈음.


아이들은 귀하게 구해두었던 깡통에 구멍 숭숭 뚫어 불꽃놀이 준비를 했다.


미리 송진 덩이나 고무조각, 장작개비 따위를 모아 놓고 냇둑에 불 피울 자리도 봐 둔 다음 날이 저물어 어서 달 뜨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어둠이 먹물처럼 초가지붕에 스미면 솔밭 동산에서 휘영청 솟아오르던 맷방석만큼 큰 대보름달.


어른들이 일러주신 대로 달을 향해 두 손 모아 소원을 비는 건 아주 잠시, 그저 시늉만 내고는 이내 들로 내달렸다.


와아─


아이들의 신나는 함성이 일면서 점점의 불길이 요괴처럼, 꽃잎처럼 여기저기 피어났다.




불씨 담은 깡통을 윙윙 소리 나도록 휘두르면 불꽃의 원이 춤을 추던 높직한 향교 마당.


평소 그 근처에 얼씬도 안 하던 아이들인데 이 날만은 떼로 몰려다녀서인지 겁도 없어졌다.


향교 생울타리인 암록빛 향나무. 늙고 구부러진 몸으로 침침하니 주술 같은 향을 뿜고 있어 왠지 으스스해 낮에도 지나다니길 꺼리던 곳이었으나 이날만은 예외였다.



마른 잡초 태우는 냇둑에서는 무리 지은 아이들 모습이 불빛 따라 일렁댔다.


무리 중 하나인 나 역시, 고무 타는 냄새가 옷에 밴 채 앞머리 몇 오리쯤 그슬려졌어도 괜찮았다.


탄광 갱도가 된 콧속도 개의치 않았으며 우린 선머스마처럼 쥐불놀이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달이 한참 기웃해서야 그 흥겨운 놀이는 끝이 났고

아이들은 하나씩 달빛 아래 잠든 자기 집으로 향했다.



그렇듯 즐겁기만 하던 대보름이 이젠 오곡밥을 짓는 외엔 너무도 평범한 하루로 주저앉았다.


의미 없이 사라져 가는 우리의 민속이 어디 하나둘일까 마는.


도회의 대보름은 더욱 삭막하기만 하다.


요란한 소음을 내며 곳곳에서 터지는 폭죽에다

대문간에 던져진 빨갛고 파란 플라스틱 조리는 왜 그리 멋없이 냉랭하게만 느껴지던지.



대보름인 오늘, 아침결에는 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하긴 하늘이란 무한대의 공간을 뜻하지만 내게 있어 하늘이란 해와 달 그리고 별이 뜨는 드높은 창공을 의미하는 것.


오후부터 날씨가 들며 차츰 하늘이 열려왔다.


비에 씻긴 달빛이라 ‘학이 물어다 빚은 옥비녀’ 란 시처럼 투명히 맑고 아름다울 오늘 저녁의 대보름달.


어쩌면 계수나무 잎잎에 스민 고운 달빛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과학문명 앞에 신비의 옷을 벗고 오래전 아폴론가하는 우주선이 왕복한 한낱 지구의 위성에 불과해진 달.


하지만 난 곱게 간직하리라.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달을 보고 소원을 빌면 그것이 이뤄진다고 믿었던 순수함뿐이랴.


송판 담장 너머로 대단치도 않은 별식일망정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웃과 훈훈한 정을 나누며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았던 그날의 추억들을.


나아가, 점점 더 황막해져 가는 세상을 살아가야 할 나의 아이들에게 옛이야기 들려주듯 가슴에 미리내 되어 흐르는 내 고향의 정겨운 사연들을 두고두고 펼쳐 보여주리라.

대보름 달빛만큼이나 운치 있고 정감 어린 그 옛날의 이야기들을‥‥‥《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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