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머리물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고 한 말이 무뚝 떠올랐다.
가시머리 동산 아랫녘 작은 바위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용천수는 얼핏 보면 보잘것없었다.
수자원 보호구역이라는 가시머리물 안내판이 없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릴 정도로 시작은 그리도 미미했다.
가시머리물이 작은 또랑 타고 웅덩이에 고였다가 시멘트 물길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릴 때는 물소리 청량하고도 힘찼다.
전에는 미나리밭이었다지만 지금은 온통 감귤 밭인 조붓한 길을 따라 가시머리물터 가까이 이르자 발밑으로 콸콸 흘러가는 물소리가 들렸다.
포장도로 아래로 물길 흘러 흘러 가시머리물은 산짓물·지장천과 합류해 동홍천을 이룬다.
더러는 건천으로 숨기도 하면서 지하와 지상으로 맥을 이어오다가 정모시에서 큰 물 되어 흐르게 된다.
정방폭포로 수직낙하하기 직전의 평화로움 잠깐 즐기고 곧이어 찬란히 투신해 바다와 하나 되는 물.
그 물의 원 줄기를 찾으려 세 번 걸음을 한끝에 이루어진 만남이다.
두 번째까지도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지장샘 아니우꽈? 할 뿐 가시머리물을 아는 이 전무했다.
새로 잘 지은 집이 아닌 동네 유래를 알만한 납작한 돌담집에 들어가도 이미 옛사람은 떠나고 대부분 신식 사람들이 살았다.
아예 그런 얘기 금시초문이라고도 했으며 어디선가 물이 나온다는 소리를 들어봤다는 이가 드물게 어쩌다 있었다.
지장천과 400미터쯤 떨어져 있다는 기록이 있기에 심지어 가시머리 동산 근처에서 물어봐도 모른다는데야...
폰으로 검색하니 엉뚱하게도 대관령에 있다는 가시머리식당이나 나왔다.
막다른 골목 앞에 허름한 간판의 공장 문이 열려있기에 안으로 들어섰더니 화공약품 냄새가 독하게 확 풍겼다.
작업 중이던 젊은이가 밖으로 나와, 어릴 적 여름철에 등목 하던 곳이라며 손가락질로 방향을 짚어줬다.
지장샘 못 미처 오른쪽으로 나있는 행길을 타고 죽 올라가면 산자락에 가시머리물이 있노라고 상세히 알려줬다.
고마워요! 페인트 내가 심하니 실내 환기 잘 시키세요, 하자 착실하게 생긴 젊은이는 본드 때문이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한창때 저마다 하는 일 달라도 어느 업종인들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
생존을 위해 제살 갉으며 살아가는 인생사라 연민이 문득.
이제 가시머리물 찾는 지도가 확실히 입력돼 있으므로 이미 찾은 거나 진배없어졌으니 그물에 든 고기나 마찬가지렷다.
조급할 이유 전혀 없으므로 마을 여기저기 핀 매화 향에 취해 여유작작, 그윽이 번지는 매화 암향(暗香)을 음미했다.
하늘 푸른데도 한라산 자취 안 보인다 싶더니 멀쩡한 하늘에서 눈발 풀풀 날려 설중매 완상하는 멋스런 운치도 즐겼다.
그윽해진 심사라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읊조리지만 지금 매화는 한창 제철 맞았다.
내친김에 홍로현정터를 찾았으나 말 그대로 현청 텃자리뿐으로 텅 비어 있었다.
높은 석축 위에 주추 하나 남아있지 않았으며 요사이 그 흔해빠진 치장품, 이를테면 고증을 바탕으로 한 복원이나 재현도 아직은.
동백꽃 피어있는 돌담 지나 온주감귤 시원지인 면형의 집을 거쳐 지장샘에 들렀는데 눈이 제법 날렸다.
샘물 말갛게 흘러내리는 물꼬에 송사리 만한 크기에 어름치처럼 몸피 투명한 물고기가 자발없이 몰려다녔다.
건천이 대부분인 제주섬인데 용케도 물 흐르는 계곡에 버들치가 산다더니 니가 버들치니?
1급수 지표어종다이 용천수 물가에 모여들 수도.
유적(幽寂)한 경지에 한참을 빠져있다가 신기해서 동영상에 담는데 먼지처럼 휘날리는 눈발 하염없이 개울로 스러졌다.
이윽고 다시 몇 걸음 내려와 가시머리물로 이어지는 골목길로 해서 계단에 올랐다.
층계 양편으로 밀감 밭이 빼곡히 들이차 있었다.
산자수명한 이 땅은, 대륙의 몽골이나 섬나라 왜국에서만 넘본 게 아니다.
중국 진시황이 보낸 서복 일행은 해동으로 불로초를 찾아 나섰다.
그 서복이 들른 삼신산 중 영주산이 바로 한라산이라는 말은 진작에 들었던 터다.
진나라는 BC 200년대이므로 우리나라는 당시 삼국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였다.
그 후 중국 송나라 때 호종단(胡宗旦)이라는 지관을 보내 제주의 명당을 없앴다는 이야기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고려 예종 때, 송나라에서는 고려의 지세가 특이함을 간파해 장차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자국을 위협할까 겁냈다.
산방산 앞 용머리 전설에 따르면, 용이 승천하는 날 천하를 통일할 능력 갖춘 장군이 태어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를 두려워한 중국에서 호종단을 보내 용머리의 혈 자리를 끊어버리라고 했으니, 일제의 대못 사건 훨씬 이전부터였다.
죄는 벌로 응징되는 법, 한라 산신이 매로 변신해 외세를 처단하니 끝내 호종단은 귀국길에 차귀도 매바위 앞에서 침몰했다고.
호종단이 용머리를 칼로 쳐내자 그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리며 산방산이 며칠간 울었다고 전한다.
용머리뿐만이 아니고 명당의 혈자리는 물혈(水穴)에도 해당됐다.
‘꼬부랑 낭 아래 행기물’ 가에서 겨드랑이에 날개 달린 아기장수가 태어나리라는 거였다.
구부러진 나무 밑의 놋그릇 물이라니?
밭을 갈고 있던 한 농부에게 노인이 나타나 쫓기는 몸이니 잠시 숨겨줄 것을 부탁해 길마 밑에다 감춰줬다.
길마는 소 등에 얹어 짐을 싣는 안장으로 곡선처럼 구부러져 있다.
잠시 후 당도한 호종단이 ‘꼬부랑 낭 아래 행기물’을 아느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농부는 모른다고 응수했고 호종단은 그 자리를 떠났다.
지장새미의 수호신은 그렇게 명운이 지켜져 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홍로 마을의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물론 지금도 퐁퐁 솟는 용천수 넘쳐나 맑은 물꼬 따라 버들치인지 어름치인지 참한 물고기 노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