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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6. 2024

첫날, 더불어 안개 그리고 반칙

Camino de Santiago


새소리와 닭 울음소리가 들리자 여기가 어디지? 어리둥절해하며 곤한 잠에서 깼다.


여명이 밝아오기도 전인데 첫날의 설렘을 안고 벌써 길 떠날 채비 하느라 모두들 분주했다.


죄다 마음은 이미 저 피레네산맥의 비탈진 언덕을 올라가고들 있었다.


창문을 여니 청량하고도 싸한 공기가 실내로 밀려들어왔다.


일찌감치 짐을 정리해서 배낭에 챙기고 트래킹화를 조여 신었다.


빵과 우유로 아침을 대충 때운 다음 골목으로 나서니 언덕길 여기저기 카미노 친구들 뒷모습이 보였다.



생장 피에드포르를 빠져나와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산길로 접어들자 자욱한 안개가 뭉터기로 몰려다녔다.


분위기 있는 고전영화의 한 장면처럼 부드러이 겨자빛 숲을 유영하는 몽환적인 안개.


안개는 밀려오는 파도였다가 젖어드는 보슬비였다가 부유하는 운해였다가 승천하는 꽃잎의 영혼 되어 스러져갔다.


그런가 하면 하늘은 비구름 몰려들다가 금세 활짝 개여, 쏟아지는 햇살들마다 푸른 오월 들판에서 텀블링을 했다.


신록 찬란한 숲, 만나는 이마다 경쾌한 목소리로 '부엔 카미노!'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하고 응원해 줬다.




가끔씩은 뒤돌아서서 떠나온 저 아랫마을을 조망도 해보고 연달아 나타나는 목가적인 너무도 목가적인 풍광들 사진에 담아 가며 행복한 길손 되어 걷고 또 걸었다.


뒤돌아보면 느새 가르마 같이 혹은 명주실같이 가느다란 길, 우리가 걸어온 그 길은 아슴히 멀리 물러나 있었다.


연둣빛 산록에는 띄엄띄엄 농장이 들앉았고 방목하는 누런 소떼 여유로이 풀을 뜯었다.  


약간의 경사진 언덕과 완만한 들길을 두어 시간 넘어 걷자 알베르게가 있는 오리손을 지나게 되었다.


몇몇은 거기서 하루 쉬면서 컨디션을 조절하겠다며 배낭을 내려놓았다.(사전 계획을 철저히 짠 그들이 옳았다.)



산책 정도 한 기분이라 전혀 지치지 않았기에 어깨 짓누르는 배낭 무게쯤 짐짓 무시하고 노래까지 부르며 발걸음도 가볍게 내쳐 전진해 나갔다.


카미노 친구들의 점점 늘어났고 평지와 언덕길은 번갈아 계속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감 빵빵해서 큰소리치길, 기다려! 피레네야~내가 간다!


내심 우쭐거리며 "나폴레옹 군대는 명령에 따라 도리 없이 저 산을 넘어야 했을 테지만 자의에 의해 기꺼이 걸으니 난 그들보다 훨씬 나은 조건이라 충분히 넘고말고." 기고만장 시건방을 떨었다.




피레네산맥 웅장한 줄기가 여기저기로 뻗어있는 산길은 점점 가팔라졌다.


시세 언덕(Ruta de los Puertos de Cize) 가까이로 향할수록 고도 또한 높아갔다.


숨찬 것은 둘째치고 배낭에 짓눌린 어깨와 등은 뻐근하다 못해 화끈거렸고 다리는 천근만근이듯 무거웠다.


오리손에서 겨우 4킬로 지점인 비아꼬레 성모자상을 지나 십자가상에 이를 즈음.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동시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사방에서 냉기 머금은 찬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쳤으나 민둥산이라 바람 피할 곳도 전혀 없었다.


광활한 목초지와 풍광 근사한 활엽수림과 산벚꽃 무리 져 핀 하얀 숲이 번갈아 나타났다.


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 상태라 구경이고 사진이고 다 뒷전, 눈도 뜨기 싫었.


정상 언덕 바로 아래까지 기다시피 올라가 바람막이가 있는 피난처 의지 삼아 기대앉았다.


정신 차릴 요량으로 에너지원이 될 비상식량과 요구르트를 있는 대로 다 꺼내 먹어치웠다.


땅기운 서늘하게 올라오는 데다 온수도 아닌 찬 음료가 속에 들어가니 한기가 더 들며  이가 딱딱 맞부딪쳤다.


지방층이 얇은 사람은 대체로 급할 때 태울 연료가 부족해 저력이 약한 편이므로 힘이 급격히 소진된다.


칼로리를 보충해 줘도 기력은 회복되지 않았고 몸이 마구 떨려오면서 손끝에서 쥐가 나며 부분 마비가 왔다.


손바닥을 비벼도 보고 겨드랑이에 넣어봐도 손가락 일부는 뻣뻣한채 요지부동.




피레네 1,300여 미터에서 체력은 완전 바닥났다.

손끝만이 아니라 입술까지 파래지는 청색증이 나타나자 괜찮냐며 지나가던 카미노 친구들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상가상 저체온증까지 겹쳤으니 상태가 심각해졌다는 걸 절감했다.
 
그 순간 즉시, 괜스레 욕심이나 미련 갖지 말고 일단 퇴각하기로 작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눅졌다.

오우케이~ 그래, 백기 들어 항복하고는  기권하겠노라 결정했다.

이 악물고 죽기 살기로 완수해야 하는 목표도 아니거늘 쿨하게 접자, 경우에 따라 포기는 빠를수록 좋은 것.

안 그래도 가족들 걱정했는데 이러다 구급차 부를 상황 맞겠구나 싶었다.   

산 넘고 국경 넘어 스페인 론세스바예스에 닿고야 말겠다던 각오는 그쯤에서 깨끗이 단념하기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등짐 지고 높은 산 넘으려면 너무 힘들다며 고난의 행군도 아니니 운반업체에 배낭 맡기라고 옆에서들 권했다.

하지만 첫날이기 때문에 십자가 지듯 직접 짊어지고 가겠노라 고집했는데 체력상 무리였다.

피레네 산행은 난코스로 소문나, 동키라 부르는 배낭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며 참작하라는 조언들을 했었다.

그럼에도 막무가내 무시하고 고집 세워 알량한 체력만 과신한 채 만용을 부린  잘못이었다.

주변 사람들 말도 적당히 귀담아둬야 하는데 나이 들수록 제 주장 제 고집이 쇠심줄로 변해간다.

점점 남의 말을 귓등으로 들어 넘기는 이 점, 아직도 더 많은 수련이 필요한 줄 안다.



한참 저 아래인 도로까지 가까스로 내려와 지나는 트럭을 세워 부탁을 했다.


몰골을 보나따나 상황파악이 된 듯, 두말없이 차를 돌려 오리손까지 태워줬으나 알베르게는 이미 만원이었다.

한 발짝도 떼어놓을 수없이 지친 상태라 30유로씩이나 주고 택시를 불러 생장으로 되돌아갔다.

방전된 에너지 충전시켜 기운을 차린다 해도 내일 다시금 예닐곱 시간 걸어 올라가 피레네산맥 넘을 엄두도 나지 않을뿐더러 자신도 없었다.

간밤에 묵은 숙소로 돌아가 하루 쉴까 하다가 기왕에 시작한 반칙, 아예 멀찌감치 점프를 하기로 했다.

물어물어 닿은 버스정거장에 마침 팜플로나(Pamplona)로 가는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소요 시간이나 거리 계산 없이 무작정 올라탔다.

아직 해가 환한 오후 다섯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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