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
바닷가에 대하여 /정호승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으리라.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으리라.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에 정착한 뒤, 그날의 월내 바닷가가 궁금해졌다.
갈맷길 따라 바다를 끼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걸어 나갔다.
동해남부선 철길을 철거덕거리며 달리던 완행열차는 사라지고 매끄러운 경전선 고속전철역이 들어선 월내.
옛 모습 간곳없고 해안 따라 즐비한 카페와 콘도며 서핑 교실, 단지 변함없는 건 파도 소리와 갈매기 나래짓뿐.
어언 사십 년 전에 쓴 일지 한 페이지.
때 이른 사추기로 속 갑갑했고 마음 허황되이 부유하던 당시였다.
비 오는 날이나 깊은 밤 또는 이른 새벽이면 산등성이 너머에서 울려오던 애수 어린 가락, 기적 소리가 생각났다.
향수랄까, 동경이랄까 그런 감정의 여울로 빠져들게 하던 동해남부선 그 기차를 타보기로 했다.
이런 때 지향 없이 떠나보는 여행도 각별한 것.
역구내에 둘씩 넷씩 짝지은 가벼운 차림새를 만남도 싱그러워 좋았다.
그들 표정만큼이나 산뜻해지는 기분.
"어디까지 갑니까?" 매표원의 퉁명스러운 말에 언뜻 대답을 준비 못한 나는 엉거주춤 시간표를 훑는다.
송정, 기장, 좌천, 월내, 울산, 경주……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경주까진 너무 멀겠고 울산 태화강변의 갈대가 보고 싶구나.
"울산표로 주세요" 행선지가 정해지자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며 괜스레 대합실의 시계를 올려다본다.
울산, 나와는 별다른 연(緣)이 없는 태화강이지만 진작부터 남모를 정념(情念)을 키웠던 곳일까.
공업 도시의 오탁을 삭히며 그래도 유연한 선율로 흐를 태화강.
그 강변의 갈대숲엔 아직도 철새가 보금자릴 틀는지 보고 싶구나.
개찰을 하고 철로변에 서니 두 줄로 평행 이룬 채 아득히 이어지는 철길 따라 영원도록 걷는 이방인이어도 좋을 것 같았다.
역마성(驛馬星)을 지녔나, 일상에서 벗어나 보는 자리바꿈의 신선한 기쁨으로 들뜨는 기분.
해운대 지나 한참까지는 청남 빛 바다가 내내 곁을 따랐다.
송림 스친 얼마 후 야트막한 구릉이 시야를 막는가 싶더니 잡목 숲이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달려도 더 이상 바다는 안 보였다.
바다를 보고 싶었는데. 망망대해 푸른 동해를 보고 싶었는데.
잡다한 생활의 너울 벗고 훌훌히 바다를 만나러 왔는데.
도심에서 멀리 벗어난 순결한 바다를 찾아나섰는데…
부산은 발치에 죽 바다를 깔고 산다.
언제라도 시선 들면 물빛 들어차고 무시로 해풍 넘실거리지만 도시 냄새가 밴, 그런 바다가 아닌 순수의 바다를 찾고 싶었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여행길에서까지 느긋해질 수 없는 자신에게 혼자 역정을 내본다.
기어이 옆자리의 아낙에게 묻는다.
"이 기차 동해남부선 틀림없나요?"
"맞심더"
"바다를 끼고 달리는 거 아닌가요?"
"이제 바단 별로 없는데예"
순간 다음 역에서 내리기로 작정해 버렸다.
태화강을 마다해서가 아니라 뜬금없어하는 눈빛이 부담스러워서였다.
'월내'라는 낯선 지명이 생경했으나 플랫폼을 빠져나온 나는 무조건 바다 냄새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납작한 슬레이트 지붕 촘촘한 사이로 멀리 하얀 돔형 건물이 눈에 띄었다.
고리 원자력발전소 일 거란 느낌이 맞아 들었고 조그만 어촌임에 비해 상가가 꽤 고급스럽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돌담 끝나는 골목길 끝에 여남은 발짝 남짓한 모래벌판, 그 아래 곧바로 바다는 누워 있었다.
어촌 인접한 해변이나 바닷가는 인적 하나도 없이 매우 한적했다.
한무리 갈매기떼 서성대는 모래톱 지나 검푸른 바윗전에 쉼 없이 부딪는 파도의 위용.
먼바다는 사금(砂金)을 뿌린 양 빛나고 있었다.
수평선은 너무도 아득했으며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의 광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바다는 포효하고 있었다.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몸부림치고 있었다.
어느 쩍 분노인지 아니면 무서운 정열을 주체 못 함인지 사뭇 용트림하고 있었다.
암청색 바다 저만치서 굼실거리던 몸짓은 끝내 파도의 흰 갈기 앞세우고 달려와 바위를 휩싼다.
그리고 부서진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흩날린다.
가슴에 응어리진 고뇌, 내 마음에 용암덩이로 가라앉은 번민까지도 흔쾌히 녹여줄 듯하다.
아 아, 이 후련함.
끊임없이 밀려와 부서지지 않을 수없는 격렬한 사랑을 나는 보았다.
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와서 허무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는 그 처절한 사랑을 영겁토록 해야 하는 파도.
머물러 붙잡을 수 없는 순간의 사랑, 아니 이루지 못할 사랑이 안타까워 종내 가슴으로 맞부딪쳐 사라지고 싶은가.
매번 새로워 젊디 젊은 파도는 그 일회성에 목말라 끝없이 이어지는 것일까.
나는 파도이고 싶었다. 파도처럼 살고 싶었다.
그러나 반납할 수 없는 삶, 엉킨 실꾸리 같은 인연의 줄을 어찌하랴.
비록 그물에 걸린 건 빈손 안의 바람뿐이라 할지라도 이대로 거두어들일 수 없는 생인 것을.
가슴에 녹 끼고 바윗돌 얹혀 드디어 피 흘리며 질식할 것 같을 때 환기를 위해 나는 이 바다를 찾으리라.
그리하여 찢긴 자존의 상흔들을 바닷물로 씻어내고 파도의 푸른 힘을 충전해 넣으리라.
넓은 가슴으로 포옹해 주는 바다가 등 두드려 주므로 나는 새롭게 일어설 수가 있었다.
이후에도 그 바다는 위로와 위안이 필요할 때마다 어깨 다독여 주는 구원처로 거기 있었다.
≪8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