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꾸무레하던 날씨가 오후 들어 슬슬 깨어났다.
푸른 하늘도 언뜻언뜻 드러났다.
대보름 무렵 범어사 뜰에서 매화를 본 생각이 나기에 계명봉에도 오를 겸 산행 준비를 하고 나섰다.
주말까지 내동 흐리거나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도 들었던 터다.
막간을 이용해 매화도 찾아보고 짧은 거리 트레킹도 하기로 했다.
늘 다니던 길을 제쳐두고 등꽃 군락지로 접어들어 초입부터 새로운 트레일을 따라 걸었다.
오른편으로 범어사 전경이 숨바꼭질하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편백나무 밀밀한 숲을 지나고 부도탑을 지나고 산죽 푸르게 서걱대는 산길 내려서자 비로소 범어사 옆에 펼쳐진 바위 너덜겅에 이르렀다.
투명한 계류가 낮은 소리 내며 얼음이 테 두른 바위 사이를 감돌아 흘러내렸다.
낯선 숲길 사진에 담으며 걷느라 절로 물외한인되었던가.
제법 시간이 걸렸던 듯 저녁때가 되며 기온이 쑥 내려갔다.
계명봉은 다음으로 미루고 매화만 구경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희끗거리는 매화가 보이는가 싶더니
양편에서 일주문을 호위하듯 피어난 홍매와 청매가 눈길을 끌었다.
좌청룡 우백호는 아니지만 멀찍이서 일주문을 받들어 지키는 시자 같기도 하고 일주문 앞에 신춘맞이 축하분을 놓아둔 것도 같았다.
동구밖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세우듯 일반 매화도 아닌 청매 홍매 짝지어 마주 세운 것이 일면 흥미로웠다.
절집이 아니라면 진다홍색 고운 홍매와 연둣빛 소슬한 청매에서 조화로운 신랑 각시 모습을 유추하게 될 듯.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청홍매에게 담뿍 매료돼 그 아래로만 몰려 사진을 찍어댄다.
담장 아래쪽, 좀 외진 자리에서 소외까지 당한 일반 매화인 백매.
하여도 서운치 않음은 대신 유현한 향기는 백매에게만 주어진 창조주의 시혜가 아니던가.
눈길 끄는 화려한 색을 능가하는, 오묘하게 스미는 그윽한 향.
공평한 신으로부터 이 세상 생명 있는 존재 모두는 이처럼 제각각 나름의 달란트를 부여받았구나.
범어사 경내는 스윽 돌아가며 목례만 올리고 되돌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