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자봉과 올레 2코스 걷기
2코스를 걷기 앞서 제주올레 아카자봉 프로그램에 조인을 했답니다.
역방향으로 걷는다지만 개의치 않았지요.
온평포구에서 혼인지를 거쳐 대수산봉과 식산봉을 올랐다가 내수면을 통해 광치기 해안까지의 여정이면 되니까요.
암튼 포인트는 대수산봉과 들판길은 휘휘해 혼자 걸을 자신이 없어서 팀으로 함께 움직이는 방법을 택한 거였어요.
약속시간은 아홉 시 반, 온평포구 올레스탬프가 있는 정자에서 만나기로 돼있었고요.
일찌감치 포구에 도착했습니다.
전반적인 기상상태는 별로였어요.
하늘도 바다도 우중충한 색깔인데 다행히 바람 잔잔하고 비가 내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지만요.
온평마을은 서귀포 어느 지역보다 올레 원형이 살아있는 곳이라 동네 한바퀴를 빙 돌았지요.
제주어 올레는 원래 '거릿길 쪽에서 정낭까지의, 집으로 들고 나는 조붓한 골목길'을 의미한대요.
현무암으로 구불구불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돌담, 곧 집담 잣담 밭담 원담 산담 등은 제주미학의 정수를 보여 준다잖아요.
그새 또 몇 가구가 재건축을 하며, 큰길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올레길이 사라져 버렸더군요.
세태 따라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제주 고유의 전통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현장 접하면 안타깝지요.
흐린 날씨임에도 시간이 되자 아카자봉 올레 2코스 걷기 예약자들이 속속 도착했어요.
자원봉사자 분들이 안전하게 선두와 후미를 지키면서 환해장성이 있는 동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지요.
통상 다니던 중앙 도로가 아닌 마을 뒷길로 접어들어 이십여분 걷자 차도에 이르렀으며 대로를 건너 혼인지 입구로 향했는데요.
삼성혈에서 솟아난 삼신인이 사냥을 하다 물결에 떠밀려 오는 석함을 보고 뛰어와 쾌성을 발했다는 온열 바닷가 지금의 온평포구.
석함에서 나온 세 공주와 흰 죽이라 불리는 혼인지 연못에서 목욕재계 후 신방에 들어 자손 번성시켜 제주 개국신화를 꽃피우게 됐는데요.
혼인지는 하늘이 점지한 벽랑국 공주와 삼신인의 인연이 결실을 맺게 되는 특별한 장소였지요.
그렇게 열린 제주 신화 속 인연의 길을 걸으며 처음 만나 서먹한 팀원들은 비에 젖은 풍경들에 취해 들었네요.
그때, 가지치기를 해서 길가에 쌓아둔 마른 줄기에 올레길 리본이 묶여있는 걸 용케도 동행이 발견해 풀어서 다시 가로수 가지에 묶어 놓더군요.
아는 만큼 보일 뿐만 아니라 마음이 있어야 범사에 애정도 생기고 관심이 가는 법 아닌가요.^^
혼인지 신방굴에 들렀다가 뒤편으로 빠져나오면 그때부터 한동안 이어지는 황량한 밭길.
사실 이처럼 무덤덤한 길, 무밭뿐인 들판에 민가나 인적도 전혀 없는 외딴 길은 휘휘하다 못해 느낌 으스스하거든요.
게다가 흙길도 아닌 시멘트 포장길이라 걷기 팍팍해 걷는 재미도 반감되는데 농로라 물론 이해는 가요.
반면 스페인 산티아고로 향하는 카미노는 대도시 외엔 거의가 흙길의 연속이라 타박타박 걷기 좋더라고요.
굳이 자연울 찾는 이유는 다듬어지거나 꾸미지 않은 야생의 순수 숨결을 접하기 위함이잖아요.
황무지에 다름 아닌 거친 밭길이 끝나는 지점이 곧 대수산봉 초입이더라고요.
산에 오르기 전 물과 간식으로 기운 돋군 후 황토 언덕길로 올라갔습니다.
해묵은 소나무 숲 울창해 전체적으로 어둑신한 산길을 쉼 없이 꼬닥꼬닥 올랐지요.
멀리서 보기엔 산세 묵직 듬직했는데 가쁜 숨 몇 차례 몰아쉬고 나니 어느새 정상에 닿았더군요.
날씨가 흐려 조망권이 제대로 확보되진 않았지만 전망대 위치만은 최고였어요.
여기서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가 바로 눈앞에 전개되더라고요.
단체로 오니 포토죤에서 멋진 동작도 익혔는데요, 여기서 팁 하나.
스탬프를 찍는 간세 앞에 서서 성산을 손바닥으로 받쳐주거나 엄지와 검지로 일출봉을 들어 올리는 포스 뽐내보시길요.
이번에 처음으로 아카자봉에 합류해 여럿이 함께 걸어봤는데요.
만일 그러하지 않았더라면 좀 전에 걸은 휘휘한 들판길이나 대수산봉에서 겁이 나 어쩔뻔했을까 어휴!
뒤로 물러날 수도 없고 앞으로 치고 나가기도 어중간한 지형, 진퇴양난이 바로 그런 상황 아니겠어요?
올레 1코스 걸으며 말미오름 허리를 달음박질쳤던 고약한 경험을 틀림없이 거듭했을 테니까요.
그간 이래저래 거치적거리는 게 부담스러워 혼자 혹은 둘이만 걸었는데요.
동행이 많다 보니 새로운 정보도 얻게 되고 무엇보다 불안요소가 사라져 좋았어요.
코스운영팀과 자원봉사그룹이 펼치고 있는 각종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이참에 정확히 숙지했고요.
대수산봉에서 내려오니 12시 반 경, 급 시장기가 몰려왔답니다.
고성 시내 복판길 굽이돌아 예약된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잘 차려진 정식을 거의 허겁지겁 폭풍흡입했네요.
오죽하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나왔겠어요.
식사 후 느긋하게 시내를 돌아 돌담으로 이어진 마을길 지나며 이것저것 호기심 풀어놓다가 이크! 여기가 어디람.
건축폐기물 부려놓은 듯한 기묘한 공터가 앞을 무턱대고 가로막더군요.
혼자였다면 틀림없이 황망했을 시추에이션.
자봉님의 리딩에 따라 문 아닌 문, 길 아닌 길을 용감무쌍하게 돌파하자 놀랍게도 연안습지가 짠~전개되더라고요.
그렇게 성산일출봉 마주 보며 철새도래지를 걸었는데요.
호수처럼 드넓고도 고요한 연안습지를 가로질러 가는 길은 매우 아기자기하더라고요.
천혜의 철새도래지인 물가에 우거진 갈대와 탐스러운 억새가 연출하는 액자 속 풍경도 색다른 감흥을 안겨주었어요.
폐 플라스틱을 활용해 만든 업사이클린 의자는 모작이란 이름이 꽤나 독특하더군요.
사물, 사람, 자연은 매듭처럼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의미의 모작은 매듭을 뜻하는 제주어라네요.
함께 걷던 도반 셋을 나란히 모작 벤치에 앉게 하고 사진을 거푸 찍었지요.
올레길 걷다가 쓰레기더미에서 올레 리본을 발견해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던 눈썰미 좋은 민트님은 뒤태도 곱네요.
'큰보’와 ‘조근보’를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뛰면서 아이처럼 동심으로 돌아가 무한 기꺼웠던 그 시간.
여기저기 물새 떼 지어 꽥꽥거렸으며 때로는 하늘가로 자유 비상하는 이곳은 철새의 낙원이겠더라고요.
하긴 온화한 날씨이기 망정이지, 온데 이리저리 수로가 연결돼 있는 지형.
따라서 기온이 낮거나 바람 거친 날은 지나갈 엄두가 나지 않을 거 같았어요.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도 배경이 훌륭해 인생샷 건지기 좋은 장소가 여기다, 싶더군요.
노랑부리저어새를 비롯 각종 철새와 텃새가 노닌다는 철새도래지를 지나 오조마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오조리 사람들이 예전엔 식수로 사용했다는 용천수 족지물을 스쳐 지난 다음 식산봉으로 향했지요.
군량미로 위장했다는 노적가리 모양의 식산봉은 여러 번 올라와 아주 익숙한 오름인데요.
이제하 시인의 화실을 찾았을 때도, 황근꽃이 필적에도, 바지락 채취하러 왔다가도 올랐고요.
정상 전망이 훌륭해서 올 적마다 한참 머물다 가는 명소 중 하나이거든요.
오늘은 뭐든 역방향인지, 평소 오르던 입구 대신 내려오는 길로 리더를 뒤따라 모두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어요.
보통 마을제를 올리는 포제단은 산 깊숙한 장소에 마련돼 있는데 특이하게도 여긴 훤히 트인 초입에 위치했더군요.
산길 오르다 쉼터로 생각하고 제단에 털썩 앉기라도 한다면 실수도 그런 실수가 없을 텐데.
식산봉은 낮으막한 오름이라 쉽게 정상에 도달하지요.
전망대에 서면 정면으로 동그마니 떠오른 근사한 수석 한덩이 성산일출봉이 나타나고요.
살짝 고개를 틀면 정말 누런 소가 누워있는 형상의 우도가 길줌하니 드러납니다.
하늘 청명한 날은 더러 이 정경 감상하러 성산포로 달려오기도 한다니까요.
먼 길 달려온만치 일출봉만 올랐다 가기 아까워 건너편 식산봉 역시 다녀가야 뿌듯한 충족감을 느낄 수 있거든요.
식산봉을 내려와 오조리 내수면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주 선 성산일출봉을 향해서 내수면 가로지른 둑길 계속 나아가면 광치기해변이지요.
이제 올레 2코스 걷기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군요.
과거 양식장이었다는 물에선 은빛 고기가 튀어 올랐는데요.
내수면 위의 다리를 건너면 전에 이제하시인이 화실로 쓰인 돌집이 기다렸으나 한때 영화 촬영지였다가 지금은 굳게
문이 잠긴 채였답니다.
집이란 사람이 살면서 훈기를 보태지 않으면 건물은 금세 퇴락해지며 폐가로 변하고 마는데.
새카맣게 부풀어 오른 독특한 용암지대인 튜물러스 지대를 감돌아 걷는 길은 새로 생긴 낯선 길이었어요.
잠깐 숲길을 지나면 곧이어 내수면 뚝방길이 길게 기다리고 있지요.
물이 빠진 바다는 질퍽한 바닥에 수로를 이용해 추상화 같은 그림을 그려놓았더군요.
광치기해변으로 빠지는 길가 좌우엔 노오란 유채꽃이 한창이었습니다.
성산일출봉과 돌담을 배경으로 한 유채꽃밭은 과연 장관이었어요.
외지 여행객들은 때 이른 봄꽃의 축제에 초대받아 한껏 고양된 기분으로 사진 찍기 바쁘더군요.
꽃길 지나 차도만 건너면 곧바로 광치기해변.
근 네시간여 걸려 드디어 14.5km 거리의 종착점에 도달했습니다.
일행은 고양된 표정으로 저마다 2코스 완료 스탬프를 꾹 눌렀으며 다음에 또 만나자 하고는 헤어졌지요.
역시 혼자보다는 느영나영 같이 걸으면 더 즐거운 올레길 맞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