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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레짐작

2009

by 무량화


집에 오는 길,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따라오는듯한 기분이 들어 힐끗 돌아봤다.

여남은 발자국 떨어져 한 남자가 슬슬 걸어오고 있었다.

키가 무척 큰 청년이었고 운동복 바지에 후드티를 입은 흑인이었다.

내가 돌아보자 그도 따라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잠깐 뒤를 돌아다봤다.

태연한 척,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그도 여전한 보조로 뒤를 따랐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으면 금방 앞장을 서련만 땡볕길을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듯 하면서 뭔가 겨누듯 걷는 걸음새조차 미심쩍은 게 겁나기도 하고 영 기분이 께름칙하기만 했다.

후끈 긴장감이 들이차면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대응책들이 재빠르게 가동되기 시작했다.

차가 씽씽 다니는 대로변이긴 하나 길가엔 작은 가게들과 자동차 정비소뿐이고 걸어가는 사람이라곤 뒷사람과 나뿐,


언제나 그러하듯 걷는 이가 거의 없는 편이다.

지형지물을 이용할 것인가, 지나가는 차에 도움을 청할 것인가, 머릿속이 갑자기 분다워졌다.

사람이 제일 무섭다더니 과연 그랬다,


아무리 백주대낮이긴 하지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겨우 한 블록도 지나지 않은 짧은 거리를 걸었을 뿐인데 등은 어느새 땀으로 젖어들었고 LA폭동이며 아침 뉴스에서 본 오리건의 총기사건까지 두서없이 떠올랐다.

그때 뒤편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젊은 여자가 유모차를 밀며 바삐 쫓아와 남자 곁에 다가서서 웃고 있었다.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고르는 아이엄마를 진득하니 기다리지 못하기는 어느 나라 남자나 마찬가지인가 싶어 피식 웃음이 터졌다.

딸내미한테 전화가 왔길래 방금 겪었던(?) 얘길 했더니 "요즘 영화를 너무 많이 본다 싶더니 대본 써?" 하는 퉁바리만 디립다 듣고 말았다.


싸다~싸!!



그러고 보니 전에 가게를 할 때도 Afro-American은 단순히 지레짐작으로 쉽게 판단했으며 선입견 내지는 편견 역시 수시로 작용하곤 했었다.

레이니에 씨는 교양 있는 흑인 손님 중의 한 명이었다.

40대 초인 그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처럼 퍽 점잖고 말수도 적었다.

태도가 조용하다 못해 조심스런 것은 물론 모든 행동거지가 도무지 흑인답지 않았다.

대체로 흑인들은 차에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다니기에 차가 쾅쾅 울리며 차체가 흔들릴 지경인 데다 걸음걸이가 유별나게 리드미컬한 편이다.

흑인들은 거개가 레게 음악에 걸맞은 머리 스타일에다 평소 걸을 때도 독특하게 리듬을 타
춤을 추듯 어깨와 허리는 물론 하반신까지 요란스레 흔들며 걷는다.

그런데 레이니에 씨는 전혀 그러하지를 않았다.

도무지 저 사람은 무얼 하는 사람일까?

손님들의 직업은 대강 갖고 오는 세탁물로도 업종 구분을 할 수 있는데 가끔 턱시도를 들고 오는 외엔 별다른 특색도 없었다.

그런 그가 음악회 팸플릿을 내놓으며 포스터를 앞유리창에 붙여달라는 부탁을 했다.

자신은 뉴저지 교향악단에서 호른을 맡고 있다며 한번 시간이 되면 음악회에 오라고도 했다.

평소에 별로 말을 나눈 적은 없었으나 가게에 항시 FM을 고정시켜 놓았기에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걸 귀담아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순수 음악, 그것도 과히 잘 알려지지 않은 관악기를 한다고? 의외였다.

흑인이라면 권투나 풋볼선수 아니면 소란스러운 팝뮤직에 종사하는 게 일반적이라서 호른을 한다는
그가 뜻밖이다 싶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보였다.

지금도 그대로인지 모르나 내가 살던 당시 필라 교향악단의 악장은 한국인이었다.

그 외 첼로와 비올라를 하는 한국인 대여섯이 그 교향악단에 있었으나 흑인은 단 한 명, 백발의
노인인 바이얼리니스트뿐이었다.

그만큼 순수음악을 하는 흑인이 드문 까닭에 그가 교향악단 단원이라는 사실에 내심 놀란 것이다.

그가 두고 간 가을 시즌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를 전면 윈도에 붙이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그래, 누군가 다른 이들은 여기서 세탁물 먼지 속에 서 있는 날 어찌 보았을까?

우리는 종종 사람을 외형만으로 혹은 한 단면만으로 섣불리 판단해버리곤 한다.



한참 전 노스엔젤레스 흑인폭동을 야기시켰던 단초가 그러하듯 외견상 검다는 이유로 흑인들은
많은 차별대우는 물론 심지어 동양인에게조차 백안시당하기도 한다.

인간평등을 주창하는 미국이지만 눈에 띄게 흑인들은 백인에 비해 여러모로 좋지 않은 인식 속에 갖가지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뉴욕이나 위싱턴 및 필라델피아의 범죄율이 높은 것도 흑인 빈민층이 두꺼운 까닭이고 보면 흑인들의 평소 삶의 태도에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닌 듯하다.

어릴 적부터 쉽게 절도나 성범죄 마약 폭력 등등에 노출되어 문제를 일으키곤 하는 흑인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의식이 깨인 흑인들이 많아, 그들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학력이 높아지며 사회진출이 활발하여 주류사회에서 활동하는 영향력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그렇지 않은 흑인들도 여전히 숱해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전 카트리나 참사 때 대부분의 흑인들이 차가 없어 뉴올리언스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 더 많이 일을 당했듯이 지금도 다수가 빈곤층으로 살며 가난 대물림현상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저 하기 나름으로 흑인이든 백인이든 동양인이든 중동인이든 다 사람 나름이긴 하겠다.

어쨌든 지금은 그 속에서 이 땅의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까지 배출된 세월이 아닌가.



어느 주말 흑인인 오코너 씨 부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들은 간편복 차림이었다.

여자는 빨간 야구모자를 썼고 남자는 짧은 머리를 레게스타일로 쫑쫑 땋아 얼핏 백수 날라리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세탁물은 거의가 정장들이어서 대체 직업이 무엇인지 의아했던 사람들이다.

백인 가정의 집사인가 싶다가도 옷 사이즈로 미루어 본인 옷이 틀림없어 보여 한동안 고개를 갸웃댔다.

필라의 흑인동네에서 비지니스하는 교민들의 말에 따르면 일부 흑인들은 어릴 적부터 예사로 폭력과 절도를 일삼으며 마약 상습복용에다 마약밀매와 연관되는 예가 다반사라고 한다.

마약 판매 시 경찰이 어린이는 검색을 하지 않음을 악용, 자식에게 마약 밀매나 운반책 역할을 시킨단다.

흑인가에서 그로서리를 하다 보면 잠시 한눈팔거나 계산에만 몰두하다가는 파는 물건값보다 도둑맞는
물건이 더 많게 된다고도 했다.

걸핏하면 도선생이 되는 손님 감시하느라 눈동자 굴리기만도 바쁜 하루라니 도벽이 얼마나 극성인지
짐작이 됐다.

예닐곱 먹은 아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건을 주머니에 슬쩍하는 현장을 잡아 닦달하면 이까짓 거 돌려주면 될 거 아냐! 하는 식으로 하도 맹랑 발칙하게 굴어 기가 차기도 한단다.

총기 사고 등 범죄율이 높은 캠든 같은 위험 지역에서 가게를 하는 이들은 방탄유리 등 안전시설을 하거나 철책 두르고 장사를 한다.

캠든에서 장사를 하는 교민들은 저마다 한두 번씩은 총구 앞에 마주서 본 경험이 있기 마련이며 끔찍스러운 일을 겪고 나면 장사고 뭐고 혼비백산 질겁을 하고는 안전지대인 뉴저지로 사업체를 옮긴다고.

페인팅이 벗겨진 건물벽에는 어지러운 욕설과 외설적인 그림이 스프레이로 휘갈겨져 있는 등,
험한 동네 풍경은 언뜻 스쳐 지나며 보기만 해도 으스스하니 섬뜩해진다.

그렇고 그런 곳에서 나고 자라 별 볼일 없는 존재일 거 같던 오코너 씨 부부가 어느 날 퇴근 무렵 들렀는데 다른 때 모습과는 달리 감색 양복으로 말쑥하니 정장 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법원에 가는 날이라서 정장을 차려입어야 했다는 그들은 알고 보니 내외가 다 변호사였다.

후에 들은 얘긴데 미국 특히 뉴저지처럼 변호사가 많은 곳에서도 그들은 사건 수임이 많은, 이를테면
아주 잘 나가는 측에 속하는 유능한 변호사였다.

옷이 날개라더니 그처럼 복장이 단정하니까 사람조차 달라 보이며 인물이 다 훤 해 보였다.

얼마 후 그 남자는 머리를 짧게 깎았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진짜 변호사답기도 한 게 한인물 더 났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함부로 지레짐작한다거나 편견에 사로잡힌 견해로 쉽게 재단해버리거나 또는 선입견의 잣대를 들이밀어 속단하는 우를 오늘도 나는 범하고 말았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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