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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9. 2024

18세기 운하가 있는 풍경

카미노 스토리

끝 모를 평원과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는 지루한 카미노 여정에 점점 지쳐갈 즈음. 짜안~하면서 비장의 카드를 선보여 분위기를 쇄신시키곤 한 카미노 길이다. 그 기대를 이번에도 져버리지 않았다. 워낙 단조롭고 황막한 지형이라 전혀 기대치 않은 의외의 풍경, 신기루처럼 대형 운하가 나타났다. 잠깐 스치는 정도가 아닌, 운하가 그것도 5㎞ 정도 뻗어있어 놀멍쉬멍 두 시간쯤 물길 따라 걸었다. 빨아 당길 듯 짙은 물빛이라 적당한 거리 둔 채 줄곧 운하와 동행했다. 물가로 바짝 다가서기 겁날 만큼 급류인 데다 물살은 세찼다. 도로 높이에 거의 차오를 정도의 풍부한 수량을 품고 운하는 묵직이 흘러갔다. 차고 거친 물바람이 미루나무 둥치를 좌우로 흔들었다. 수면에 물비늘이 무수히 일렁였다.


18세기 때 만들기 시작했다는 이 운하는 길이가 장장 이백 킬로미터. 그중 일부를 걸어가는데 단조로운 빤한 길이지만 묵묵히 걸으며 상념에 잠길 수 있어 좋았다. 고른 둑방길은 소실점마저 아득히 가물가물 아롱거렸다. 주변 풍광이 눈 맛을 돋워줘서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강물 건너편 광활한 초록 들판이 시원스러워 한참 서서 지켜보는데 홀연, 우리 집 가족사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배경은 푸르른 창공 그리고 밀밭과 유채꽃밭. 물가에 일렬로 서있는 나무 네 그루. 삼십 년 전쯤만 해도 큰 나무는 아빠 엄마였다. 부모 바라보며 힘껏 키재기 하는 아들 그리고 작은 묘목 딸내미 아직은 철부지. 어느새 완전히 역전이 됐다, 순리일 테지만. 키는 물론 위상 점점 오그라들어 대지 가까이 붙어버린 볼품없는 아빠 나무 엄마 나무. 훤칠하게 자란 큰 나무 아들 대견하고 오빠 따라 밋칠하니 발돋움하는 딸 나무 역시 그저 고맙다. 여여한 강둑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나무 실하게 키우고 강물은 상시 흐르고 흘러 새 물길 이어가나니, 변화는 그래서 당연 은총인 것을.   


메세타 지역에 펼쳐지는 방대한 밀밭을 티에라 데 캄포스(Tierra de Campos)라 부른다. 이 대규모 밀밭이 바로 스페인의 곡창지대. 여기에 카스티야 운하 (El Canal de Castilla)가 건설된 것. 이 운하는 티에라 데 캄포스 평원을 고루 적셔주며 밀과 옥수수를 분쇄하는 물레방앗간을 돌게 한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물류 이동이다. 운송수단이 시원치 않았던 당시, 곡물을 스페인 북부의 여러 항구로 실어 나르는데 이용된다. 1753년 시공에 들어가 거의 100년 후인 1849년 공사를 마친다. 운하 길이는 207㎞, 너비 11-22m, 수심 1.8-3m, 양 켠에 갈대가 우거진 강변은 거의 똑바르고 시퍼런 물빛으로 미루어 깊이는 상당해 보인다.



운하 둑 밑으로 수로를 연결해 평야로 물을 대주는 설비까지 꼼꼼히 마쳤다. 운하의 영화는 그러나 삼십 년도 못 가고 철도의 등장으로 빛을 잃고 만다. 1765년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고 영국의 스티븐슨이 1825년 철로에서 증기 기관차를 운행시킨다. 작은 배에 실어 나르던 곡물은 효율성에서 비교가 안 되는 보편화된 기차로 대량 운송된다. 결국 긴 시간과 자본을 투자해 야심차게 펼친 대 프로젝트는 무위로 끝난다. 공사 완공을 보기 전에 중도 하차, 격변하는 시류에 따라 진작 손을 턴다. 카스티야 운하의 물류기능이 사라진 지금은 관개시설과 관광자원으로 전용되고 있다. 18세기 스페인의 국력을 상징하듯 한 대형 토목공사이면서 뛰어난 기술력이 돋보이는 카스티야 운하는 1991년에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인간사 한 치 앞을 모른다지만 국가 경영은 백 년을 내다보고 설계한다. 부침하는 정치세력, 권력의 판도에 따라 정책은 수시로 널을 뛴다. 어제 옳다고 내린 결정이 내일 옳지 않다는 판정을 받기도 한다. 그것도 아닌 왕정시대 스페인이 벌인 토목공사는 운 때가 지지리도 나쁜 셈. 하필이면 운하 건설하자 기관차가 톡 튀어나올게 뭐람. 그러나 애닳다 하지 않아도 될 먼 나라 남의 나라 사정이니 강 건너 불구경이다. 잠시 스쳐 지나는 길손이야 운하 감상 삼매경에 빠져 저으기 흐뭇하다. 물방울처럼 튕겨 오르는 폴카 스텝으로 운하 길 걸어 튼실해 보이는 수문통에 이른다. 삼거리 이정표, 콤포스텔라에 얼추 반은 왔다는 표지야 수긍되지만 예루살렘이며 로마 거리 표시는 영문을 모르겠고. 저 건너로 품위 있는 중세도시 프로미스타(Fromista)가 눈앞에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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