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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9. 2024

걷는다는 건

Camino  story


Why did you want to climb Mount Everest?라는 질문에 Because it is there라고 쿨하게 답했다는 Goerge Leigh Mallory.

왜 카미노를 걷나요? 라 묻는다면 맬로리처럼 즉각 명쾌하고 간결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곤 했었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길이 거기 있어서?

세상에 길은 무수히 열려있는데 왜 하필 그 먼 스페인 산티아고여야 하느냐면 그만 말을 더듬게 되고 만다.

답이 궁색한 때문이다.

사실 딸내미조차 그랬다.

무진무진 걷고 싶으면 기왕 한국 간 김에 걸어서 국토 종단을 해보든지 제주 올레길을 완주하거나 지리산 종주를 해보라고.

그럼에도 나는 기어코 그곳으로 향하고야 말았으며 그 길을 가는 내내 충만한 행복감에 싸여 무수히 감사합니다! 를 되뇌었다.

그 길을 걸으며 매 순간 좋고 좋고 또 좋았다.

정작, 짐무게에 치여 어깨 통증을 겪어야 했으며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옮겨야 했으며.

오늘은 어디서 쉴 것인가 날마다 깃들 곳을 염려해야 했으며 세끼 무얼 해 먹어야 할지 신경 써야 했으며...

실제로 어떤 한국인 청년은 한창때인 젊은 체력을 믿고 초반에 너무 무리하는 바람에 무릎을 상하게 했다.

그 바람에 관절이 퉁퉁 부은 채로 중간에 포기하고 절뚝거리면서 귀국하는 경우도 봤다.

비를 맞아 감기 걸리기는 예사, 한껏 멋 부리며 걷던 아가씨는 조이는 등산화 탓에 발바닥이 물집투성이라 병원 치료를 받기에 이르렀고.

하루 40킬로씩 격하게 걷던 교포 아짐도 심한 피로 증후군으로 결국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덴마크에서 왔다는 건장한 장년의 남자는 몸살이 나 삼 일째 알베르게에서 꽁꽁 앓으며 깡통 음식으로 겨우 요기를 때웠다.  

그게 보기 딱해, 동행했던 수녀님이 쌀로 타락죽을 끓여다 준 적도 있었다.

카미노 후기를 보면 발이 부르터 만신창이가 되었다거나 알베르게 예약을 안 해서 낭패를 보았다거나 베드 버그 땜에 고생했다고들 한다.

헌데 다행스럽게도 아무 탈 없이 무사히 긴 여정을 마쳤으니 행운아랄까.

전생에 무슨 인연줄 깊이 엮인 듯이, 아니면 누군가가 부르는듯해, 마치 무언가에 홀리듯 다녀온 산티아고.

아무튼 50대부터 벼르기를,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며 버킷 리스트 첫째로 삼은 Camino de Santiago다.

프랑스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시작, 스페인을 가로질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머나먼 여정.

그 길을 날마다 걸어서 가야 하는 여정이라는 점에 더 매료되었던 거 같다.(하지만 두 발로 전 구간을 필히 섭렵하지 않아도, 시간 내기 여의치 않으면 중간부터 시작해도 괜찮아!)



경건한 신심의 소유자가 아니라서인지 성지순례 같은 걸 별로 선호하지 않으면서도 산티아고만은 꼭 가보고 싶었다.

이상하게 사용하기 거북스러운 단어가 있는데, 청아하다느니 고독이라는 단어가 그렇듯 순례자 역시 쑥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제목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읽히나 중세 수도사도 아니면서 감히...

자신을 그런 카테고리에 집어넣기가 민망스럽다 못해 어쩐지 오글거려진다고나 할까.

밀밭 푸르게 파도치는 평원을 지나면 거친 돌팍길이 나오고, 양귀비 하늘거리는 성곽마을 걷다가 낡은 교회당과도 조우하고.

캘리포니아 황야 같은 산모롱이 돌아 한참 걷다 보면 새로운 마을이 아슴히 돋아나며 강물 흐르고, 강 위에 운치 있는 아치 다리로 이어진 길이 기다리는...

지향 없이 걷는 거보단 일정 방향을 두고 걷는 게 나아, 그렇게 그냥 길을 걷는 길손으로 카미노를 걸었을 따름.




 난 잘하는 운동이 하나도 없는데 걷기만은 자신이 있다.


워크홀릭이라 할 정도로 날씨만 번하면 하루 몇 시간이고 여기저기 걸어 다닌다.


일을 해야 살맛이 나는 workaholic이 아니라 일중독자는커녕 게을러빠진 잠보에다 살림살이는 대충대충, 틈만 나면 밖에 나가 걷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영화 <트루먼쇼>처럼 만일 누군가가 내 일상을 관찰한다면 참 싱거운 사람이야, 대체 무슨 멋일꼬? 하겠지만.

비 오는 날 빼고는 하늘만 보이면 체력의 한도 내에서 무진 걷고 또 걷는 게 취미다.

오죽하면 이름난 세계 유수의 관광지 제치고 먼 스페인까지 가서 한 달씩이나 걸을 생각을 할까.

자신이 좋으니 위험한 암벽을 타듯, 그처럼 한 가지에 완전 홀리지 않고서야 사서 고생하는 그 일이 가당키나 하랴.

스스로 좋지 않으면, 중독 상태에 이르는 도락이란 있을 수도 없을 터.

한마디로 몰아적인, 어떤 경지에 풍덩 빠지는 일이 홀릭일 테니. 


한국에 살 때도 산행을 어지간히 다녔는 데다가 뉴저지에서도 랭커스터에서도 짬만 나면 잘도 걸었더랬다.    


전엔 유유자적 슬슬 걸어 다녔다면 요즘은 경쾌한 느낌이 들 정도로 보폭을 넓혀 나름 활기차게 걷는 편이다.


허준 선생은 일찍이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 식보보다 행보(行補)'라 했다.


그래서만이 아니라 생래적으로 걷기를 좋아하다 보니 스페인까지 오게 됐다.


부득이한 일로 완전 도보 독파는 어렵게 됐지만 대신 시간은 벌었으니 그로 족하다.


달 중 여러 날을 충분히 걷고 또 걸었다.


내놓고 잘하는 짓이라고는 걷기뿐인 사람이나 그래도 장한지고~


저녁이면 무릎 관절과 장딴지도 쓰담쓰담해줬다. 어깨 몇 번 스스로 토닥여줬다.


무엇보다도 카미노길 걸을 엄두를 낼 정도의 건강, 정녕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마침내 그 길을 걷고 나서야 알았다.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카미노를 걷는지를.


바로 이 충일감 때문이리라.


<병원 치료받고 온 아가씨 발은 상처투성이나 발이 퍽 맵시 있고도 고왔다>

<가볍고 통풍이 잘 돼 한 달 동안 애용하며 혹사시켰어도 한 번도 삐끗한 적 없이 잘 보필해 준 고마운 Merrell 트래킹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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