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대구 살 적 일이다.
울안 라일락 나무 실한 가지에다 카나리아 한 쌍이 든 새장을 매달아 놓았다.
어느 날 모이를 주며 방심한 틈에 두 마리 다 잽싸게 새장을 벗어나 순식간에 날아갔다.
훨훨 날지 못하니 퍽도 갑갑했던 게지...
얼마나 자유가 그리웠을라구...
아쉽고 아깝지만 할 수 없다 포기했다.
어스름 내린 저물녘, 라일락 근처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카나리아 한 마리가 돌아와 새장 근처 가지에 수굿하니 앉아 있었다.
누군가에게 잡혔는지 다른 한 녀석은 끝내 귀환하지 않았다.
새장 안에서 살던 새는 기껏 조롱을 벗어나봤자 천지 사방이 위험처다.
먹이는 물론 노숙도 위태롭고 오직 정글의 법칙만 적용됨을 곧장 깨우치게 된다.
이미 길들어 손을 탄 애견은 야생 늑대의 삶을 살아낼 수가 없다.
깡통 사료에 길들여진 고양이는 들고양이처럼 쥐를 잡아도 먹을 줄은 모른다.
생명 본연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야생력을 진작에 잃어버렸으니까.
이제 본래의 '나'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구태여 생존을 위한 역량이 필요치 않은 보호막 안에서 그새 안일이 주는 달달한 삶의 관성에 익숙해졌으니.
공원의 다람쥐나 오리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이유는 그들이 고유의 야생력을 잃게 돼 생태 교란으로 까지 이어지므로 이를 금하고.
딱 나흘, 고관절 통증으로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
앉은 자세가 문제였다.
교자상을 책상 삼아 노트북 펴놓고 양반다리를 한채 몇 시간을 컴놀이에 빠졌다가 일어나려니 아구구.
걷는 일에 제동이 걸리니 하릴없이 누워서 지냈다.
내 몸 아픈 데만 신경이 쓰이지 사실 뒤란 텃밭조차 안중에 없었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걸음을 뗄 수 있게 되자, 일단 문을 죄다 열고 집안 환기부터 시켰다.
아래쪽에서부터 복숭아꽃이 피기 시작하는 바깥엔 봄볕이 눈부셨다.
그간 방치하다시피 한 텃밭으로 살살 나가보았다.
아니.... 어쩌면 이럴 수가...
뜻밖에도 채소들은 누런 잎이 진 채로 데친 듯 후줄근하니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겨울밤 차디찬 눈서리에 얼었다가도 아침이면 신기하게 깨어나던 그들이다.
며칠 상관에 이리 어이없는 상태까지 되리라고는 짐작조차도 하지 않았다.
하긴 한낮의 햇살이 좀 강렬한 지역인가.
그동안 목이 타기 전에 알아서 물을 주고 돌봤으니 자력으로 헤쳐나갈 어려움 따윈 없었고.
바로 그게 문제, 작금의 유전자 변이종은 환경에 순응해 곧이곧대로 그 영향을 따른다지 않던가.
밭을 일궈 채소를 심은 옆자리에는 나지막한 키의 야생화와 잡초가 야무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작지만 아주 당당하고, 샘나도록 싱싱하니 기운차게.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끈질기게 견디며 어디서 건 살아 나가는 힘이 있는 들풀들에 반해 인위적인 손길에 길들여진 채소들은 본디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야생 상태의 생존법, 그 먼 옛적 기억은 이미 하얗게 지워져 버린 뒤이므로.
여북하면 온실 속 화초란 말이 나왔을까.
부실해진 몸을 다시 재생시키는 능력인 회복력이나 자생력 또는 힘든 환경을 버텨내는 인내심이나 지구력, 맹렬한 오기 같은 깡들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도...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