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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21. 2024

스페인 고속철도 타보고

카미노 스토리

일찍이 피레네에 투항하고 선로 이탈해 버려 스스로 다짐했던 목표인 '걸어서 카미노 완주'는 어언 물 건너갔다.

기왕에 탈선했으니 제멋대로 갈지자걸음인들, 삼천포로 빠진들 어떠하랴.

아마도 이래서 첫 단추를 잘 꿰라 누누이 이르는 모양이다.

지키라는 룰 처음 한번 어기기가 어렵지 한 발짝만 선을 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까짓 거~라는 심사가 들더라는.

시종일관 완전무결하게 철두철미 원칙 지킨다는 소신 간단히 허물어지게 되니까 이후부터 느긋하니 여유가 생겼다.

탈 것 몇 번 이용해 본 유경험자, 이번엔 아직 안 타본 스페인 기차도 타볼 겸 레온까지는 전철로 이동키로 한다.


구릉 하나 없는 대평원, 끝 모르게 펼쳐진 곡창지대.


강하게 내리쪼이는 땡볕 고스란히 받으면서 하염없이 걷다 보니 시야가 하얘졌다. 이러다 쓰러지겠다 싶었다.


인내심이 바닥났다.


바로 이게 사서 하는 쌩고생, 고난의 행군에 버금갈 100% 리얼 고행이 아닐쏜가.




고속으로 질주하는 전철 창에서 내다본 자연은 아직도 황막한 메세타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아득히 이어진 길에 점점이, 짐무게에 눌러 구부정한 실루엣 이끌며 밀밭 사잇길 걸어가고 있는 순례객은 고행자.

어느새 오월도 중순, 해 점점 뜨거워지니 등판은 땀으로 푹신 젖었을 테고 목인들 얼마나 탈 것인가.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아무리 좋아서 걷는다 해도 윤심덕 노래가 절로 오버랩됐다.

나지막한 농촌마을을 지나고 공장지대를 지나 기차는 레온 역에 닿았다.

큰 강을 낀 도시 레온은 인파로 붐볐는데 활기찬 여행자 등 유동인구가 유독 많았다.

레온이 스페인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이기도 한 이유에 더해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주요 거점 도시여서일까.

시간이 여의치 않아 짧은 기간 동안만 카미노 길을 걸어보려면 레온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 여기서부터 걷는 이들도 적지 않다.

카미노 인구가 부쩍 불어난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긴장의 끈 늦추고 설렁설렁 왔어도 어언 나의 여정도 중간 지점 가까이에 이르렀다.



레온왕국의 수도였던 스페인의 대도시 레온.

여느 유럽 풍물이나 마찬가지로 중세 유적지와 현대 빌딩가가 의좋게 공존하고 있었다.

1세기경 로마인들이 개척한 황금 집산지였던 레온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경제 중심지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12~15세기까지 종교회의며 유럽회의가 열렸던 유서 깊은 도시로 문화유적이 널려있는 곳이다.

땅만 보고 묵묵히 걷다가 이제부터는 고개 한껏 치켜들고 번화한 거리에 히야! 감탄사 연발하는 자동 촌넘이 되고 만다.

행인에게 묻거나 지도를 볼 것도 없이 뾰족 지붕이 보이는 방향 쪽으로 무조건 걸어가면 목적지가 틀림없이 나온다.

길 찾는 데는 이 방법이 앱이니 나침판이니 타고난 동물적 감각보다 더 빠르고 확실하다.  

예전 수도원을 개조해 프란치스칸들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남. 여 방이 분리된 데다 무척 깨끗했으며 봉사자들은 친절했다.

레온에서 만 하루하고 반나절을 머무는 동안 평소 하루치 걸은 것보다 더 많이 걷고 더 바쁘게 쏘다녔다.

그만큼 도시 자체 규모도 컸거니와 사방에 볼거리가 산재해 있어 명소 표기가 된 관광 지도를 들고 다니며 구석구석 훑었다.

레온 대성당 등은 중세건물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까마득 높이 치솟아 도저히 전모를 한 장 사진에 담아낼 수조차 없다.

어디 한 곳 소홀한 데 없이 창틀 하나 지붕 꼭대기까지 섬세하고 정교하게 꾸민 솜씨가 현대 스페인의 건축기술로 발전했으리.

국가부도사태 직전까지 몰렸던 나라이나 저력 만만치 않아 아직도 건축, 고속철도, 가죽가공술은 여전히 유럽에서 명성 알아준다.

그 바탕에서 가우디가 탄생했으며 자동차 제조 강국으로 부상했고 세계적 가죽 장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리.

쇼핑가를 지나다 눈에 든 가죽 재킷은 디자인과 색상이 맘에 드는 데다 여름 세일 중이라 가격도 착한 편.

품질을 인정하는 스페인 가죽이나 보다 중요한 건 짐 하나 더 보태는 게 무서워 그대로 지나쳤는데 한동안 눈에 삼삼했다.

내쳐 시골 흙길만 걷다가 도시에 들어왔으니 노천카페에서 여유롭게 와인잔 기울이는 유러피안들 흉내도 내볼까 했다.

허나 새로운 풍물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야 하는 잠시 지나가는 길손.

더구나 레온은 여러 유형의 중후한 유적지가 풍기는 고품격 향에다 현대의 세련미까지 겸해 이래저래 발품을 무진 팔게 했다.  

박물관은 시간도 부족하지만 진작에 진력을 낸 터라 들어가지 않고 외관만 휘휘 구경했다.

그만으로도 중세를 다 섭렵한듯한 충만감으로 뿌듯함을 안겨준 레온이다.  



                             ​***

산토도밍고 광장에 있는 가우디가 설계한 카사 보티네스는 요새처럼 보이나 고딕 성당에서 영감을 받은 1800년대 말의 작품.

부활절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사도 요한 상과 성모상을 어깨에 지고 이 광장에서 행진한다고.

레온 대성당 (Catedral de las Leon)은 무어족을 물리친 기쁨에 하느님께 봉헌한 교회로 치솟은 탑과 우아한 장미창과 이중
아치에 더해 섬세한 조각이며 스테인드글라스 등 프랑스 스타일의 고딕 양식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바로크풍의 중세 향기가 짙게 스민 낭만적인 우메도 지구 (Barrio Humedo)는 질 좋은 포도주와 전통 음식인 따빠스(Tapas)를
즐길 수 있는 바와 카페가 즐비한 구시가 중심거리.

메세타를 힘겹게 건너온 순례자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십자가 앞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이 조각상은 호세 마리아 아퀴나(Jose Maria Aquna)의 작품.

16세기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만들어진 산 마르코스 (San Marcos) 수녀원은 1541에서 봉헌된 르네상스 교회 건물로
고고학 박물관 규모가 엄청나다.

16세기 구즈만 (Guzman) 가문의 의뢰로 건축된 Guzamanes 궁은 Casa Botines 바로 옆에 자리했으며 현 레온 의회 건물.

산토도밍고 광장 벤치에 앉아있는 가우디 동상 옆에서 세기의 대가를 직접 만난 듯 감회에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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