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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파(麥波), 보리밭에 일렁이는 연초록 파도

by 무량화

서귀포의 봄은 화사한 꽃들이 다투어 보내는 화신으로 열린다.


설화 눈부신 한라 산록에 복수초 피어나고 여린 노루귀 쫑긋 꽃대 올리기 전, 진작에 이미 서귀포는 신춘을 맞았다.


붉은 동백으로 시작해 노오란 유채에서 새하얀 매화와 연분홍 벚꽃으로 꽃소식 이어졌으니.


거기에 싱그러운 풋보리 초록 파도 너울너울, 봄 정취 무르녹는 서귀포.


오는 듯 가고 마는 봄,


이 봄날 다하기 전에, 가뭇없이 떠나기 전에 봄마중 나가서 도연한 흥취 꽃놀이에 취해보려...



안덕에서 화순 거쳐 사계리 벌판으로 접어들었다.

산방산을 빙 둘러가며 사방에서 조망해 보고 싶어서였다.

흔히 정면에서 찍은 사진만 봐왔던 산방산, 화순에서 산방산의 옆모습을 보니 어찌나 생경스럽던지 신기로웠다.

동쪽 방향에서 바라본 산방산은 전혀 산방산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덕수마을 거쳐 대정 쪽으로 향하던 중 바라본 산방산의 뒤태는 낯설다 못해 너무도 뜻밖의 산세라 어라? 싶었다.

설악 한자락을 옮겨다 놓은 듯 근육질 거칠기에 아예 목적지를 바꿔 산방산 탄산온천에서 하차했다.

이번엔 작정하고 서쪽 측면에서 산방산을 자세히 조망하기 위해서였다.

왁살스러운 골격의 남성미가 읽히는 산방산을 좌측에 두고 기상 단호하고 날카로운 단산을 우측에 거느린 채 밭둑길을 걸었다.

브로콜리며 양배추는 대충 수확한 다음이라 현재 작물은 주로 마늘이었고 더러는 보리밭도 보였다.

벚꽃잎 날리는 봄바람 타고 맥파가 출렁였다.


청보리밭에 초록물결 일렁일렁, 봄의 왈츠에 취한 맥파.

한참을 멈춰 선 채 보리이삭 출렁임 그윽이 바라보노라니 문득 낙안읍성마을의 여름이 생각났다.

오래전,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전통 민속마을을 개방해서 예술인들에게 창작의 방으로 제공한 적이 있었다.

그때 옆방에 든 분이 맥파를 주로 그리는 여류 동양화가였는데 이름이 이정자 씨였나? 이숙자 씨였나? 가물가물하다.


두 이름을 넣고 검색해 보니 한국화단의 거목인 이숙자가 그녀 맞다.


조용조용한 말씨에 자태 단아하던 동양화가 그녀는 오래전 낙안읍성의 초가집을 기억할까.

100호는 넉히 될 대작을 펼쳐놓고 섬세한 세필로 보리 이삭 하나씩을 그려나가던 그녀는 당시 50대였으니 지금은 팔순 중반에 이르렀고.

일렁이는 바람결 따라 부드럽게 왈츠를 추는 청보리밭에 취해 그만 산방산은 까무룩 잊고 말았다.

아무래도 청보리가 바람 더불어 탄주하는 초록 물결을 보러 청보리 축제 열리는 날 가파도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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