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새벽 이른 시각, 전에 두 번 와본 적이 있는 땅끝이라 감각과 짐작만으로 바다가 기다리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송호리 해수욕장에서 야트막한 동산 하나 넘자 갈산 마을이 나타났고 황토 언덕 아래 바다가 드러났다.
새벽닭 긴 울음이 들려왔으며 어느 섬에서 이듯 아득히 개 짖는 소리도 났다.
고샅길엔 허리 기역 자로 굽은 노친네와 진돗개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순회하는 이장이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밭두렁에 완두콩 강낭콩 꽃 호젓이 폈고 호박 줄기 땅내 맡아 무성히 뻗어나가는 중이었다.
바다로 나가는 언덕 쪽이 왠지 침침하다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름드리 노거수 고목 줄기가 얼크러설크러 진 채 용틀임하고 있어서였다.
비파나무 군락지가 있다고 들었기에 그 나무려니 했는데 잎 너른 후박나무와 이파리마다 참기름 바른 양 윤기로운 동백나무 군락지였다.
녹빛 숲 우거져 열대의 밀림지대도 같고 오지에 파묻혀있는 처녀림도 같은 방풍림을 겸한 숲의 위용은 장관이었다.
수령 150년짜리라는 설명이 수긍되고도 남을 정도다.
짙은 숲 앞머리에 조선시대부터 있었다는 당집은 고산 윤선도와의 기연으로 시작된다.
유배지인 보길도로 가기 위해 배를 탔으나 고산은 심한 풍랑에 시달렸다.
이때 뱃머리에 한 할머니가 나타나 '내가 쉴 곳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하기에 후박나무숲에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서둘러 당집을 지어 제물 올리고 제를 지내자 풍랑이 멈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뱃길 오가는 이들은 당집이 얼마나 영험한지를 잘 아는 터라, 봄마다 당굿을 걸게 열기도 했다.
그처럼 먼 바닷길 떠나거나 출어기가 되면 먼저 자연계의 신께 정성껏 비손 바친다는 뱃사람들.
방풍림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후박나무 군락지가 여태껏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던 이유다.
지금의 당집은 60년대 초대형 태풍인 사라호로 소실되자 훗날 다시 지었다.
새벽안개 자욱해 바다는 무채색으로 무표정했다.
묵언 정진이라도 하듯 파도조차 음성 나직해서 거의 침묵 수행에 들어가 버린 사위.
아침해는 겹겹의 구름에 가려 아예 자취 묘묘한 채라 만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벌써 포구는 전복 양식장을 오가는 배들로 분주하다.
땅끝마을 앞바다에는 가까이 멀리 떠있는 섬이 점점이 뿌려져 있다.
건너편 고요한 섬 앞에는 규모 너른 양식장이 길게 펼쳐져 있었고 작업하러 가는 동력선이 힘차게 물살을 갈랐다.
이곳 역시 뱃일하는 사람들은 거개가 외국인 노동자들, 체구 자그마한 동남아 사람이 자기네 나라말을 주고받으며 지나갔다.
젊은이가 죄다 도시로 빠져나간 터라 그들 아니면 힘든 허드렛일을 할 사람이 전무한 것은 오늘의 대한민국 어디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대로 열심히 한두해 노력하면 목돈 챙겨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피차 좋은 일.
요즘 농어촌이 윤택해진 건 농가에선 비닐하우스나 원예작물 재배 등의 영농방식을 도입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어촌 역시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양식업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리라.
어로 도구들이 낯설다 싶었는데 부산 쪽의 미역 다시마 양식과 달리 땅끝마을 어민들은 거의가 전복 양식에 치중한다.
미역 양식이 일 년 농사라면 전복은 삼 년은 지나야 채취할 수가 있다니 성정 따라 바다농사 품목도 정해 지나보다.
목소리부터 성급한 경상도와 비교되는 이쪽 지방은 진득하기로야 따를 이가 없다 보니 삼 년씩이나 기다렸다가 전복을 수확했다.
며칠째 땅끝마을에서 묶고 있던 언니는 그 덕에 싱싱한 전복을 매일이다시피 사 먹었는데 현지 가격이라 값도 저렴했다고.
한적한 어촌이던 땅끝마을도 여러모로 무척 변했다.
변모는 지붕만이 아니라 양식으로 지은 집들이 대폭 늘었으며 대형 리조트가 들어섰고 이국풍 펜션이 흔하게 눈에 띈다.
산길 한참 걸어서 오르던 전망대를 오르내리는 모노레일이 생겼다.
그런가 하면, 전에 하루 두 번 드나들던 보길도 가는 노화도행 배편도 연신 시간마다 자주 오간다.
물에 발 담근 형제바위나 예전 그대로일 뿐 연안 풍경은 죄다 바뀌었다.
대한민국 육지가 끝나고 바다와 만나는 최남단 지점인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땅끝마을.
마침 시야 전면에 들어서는 노화도 오가는 배가 갑판을 닫고 출항한다.
출발신호를 받은 철부선은 차량까지 실어 나르는 세련된 여객선이다.
땅끝마을 선착장 입구에 선 안내판을 읽다가 막 부두를 떠나는 육중한 여객선에 살짝 손 흔들어 주었다.
맴섬과 형제섬이 지척거리이고 도로변 우뚝한 땅끝 표지석은 우람스러웠다.
금아 선생의 <인연>이란 제목의 수필이 있다.
유학시절 일본에서 하숙하던 집의 딸인 성심여학원생 아사코라는 귀여운 소녀에게 느꼈던 연연한 마음이 첫 번째 인연.
세월이 흐른 다음 아사코가 대학생이 된 후에 두 번째로 재회, 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산책을 했다.
광복과 한국전쟁이 지나간 뒤 다시 도쿄에 가서 아사코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일본계 2세인 진주군 장교의 아내가 돼있었다.
백합처럼 시들어가는 그녀를 보고 돌아오며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란 생각이 들었다고 하였다.
혹여 그럴지도 모르기에 내심 아끼던 윤선도의 세연지도, 전망 좋은 땅끝 토말비도, 여정에서 말끔 접어두고 미련 없이 변산반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