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는 그럭저럭 네 번째 걸음이다.
처음은 남편 친구 가족과 함께 휴가차 왔었고 두 번째는 이어령 문화부장관의 배려로 낙안읍성에 머물 때 들렀다.
그때가 1992년으로 당시 남긴 글이 맨 아래에...
세 번째는 이민을 추진하며 태평양 오가던 와중, IMF로 환율이 급등해 주춤한 때라 기억도 새로운데 광주 비엔날레 관람 후 여류문인들과
동행했다.
이십여 년 만에 와보니 전보다 어째 맥이 빠진 듯 정체돼 있는 느낌이 드는 건 해질 무렵이어서인가.
그때는 법정 스님이 불일암 거처 삼아 송광사의 큰 기둥 역할을 해서였을까,
한참 중창불사도 일어 전제 분위기 역동적이고 법당마다 윤기 자르르했다.
지금은 옛 활기 가라앉아 영 적막하지만 대신 수행처로서의 조촐한 진면목은 회복한 거 같았다.
호젓하니 분답지 않아 좋고 단청빛 화려하지 않아 편편스럽다.
그러나 송광사도 세간사 흐름에서 초연하진 못해 템플스테이 자리 크게 꾸미느라 주차장 넓히는 중이다.
계절은 봄이건만 지는 해가 마지막 심호흡 크게 하며 산이마며 절간 담벼락을 가을빛으로 물들여놓았다.
저물녘이라는 말이 참 좋다/ 쉼 없이 달려와 남은 한 걸음을 두고/ 머뭇거리는 시간. 빈손의 시간....김도해의 시가 위로이듯 다가선다.
세상 모든 것들이 그림자가 되는 순간이 있다/ 하늘도 산도 나무도 꽃도/ 집도 길도 흐르는 강물도/ 제 색깔을 다 내뱉고....
안오일의 시처럼 다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위안 같은 시간, 위로를 주는 햇살의 잔영이 따스하다.
남도를 돌아다니면서 하도 절구경을 여럿 한 터라 더 이상 각별한 감흥도 일지 않던 차.
다 게가 거기인 듯 환시처럼 겹쳐 보이고 거의 형체 뒤엉켜 헷갈리고 어릿거릴 정도여서 해 저물어가는 오후 느지막에 잠시 들렀다.
조계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송광사.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이다.
불교의 귀의 대상인 불(佛) 법(法) 승(僧) 세 가지 보물을 가리키는 삼보로 통도사가 불, 해인사가 법, 송광사는 승에 해당한다.
즉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이 양산 통도사다,
부처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합천 해인사는 법보사찰이다.
이와 더불어 16 국사가 연이어 배출된 승보사찰(僧寶寺刹)로 유서 깊은 순천 송광사다.
법정 스님이 백석 시인의 연인으로부터 성북동에 있는 요정 대원각을 통째로 시주받아 설립한 길상사, 송광사의 본디 이름도 길상사였다.
덧붙여 전통적인 승려 교육과정인 선원(禪院)·강원(講院), 율원(律院)을 집합시켜 놓았다는 뜻에서 삼보사찰은 총림(叢林)이라고도 한다.
총림에 들려면 침계루를 거쳐야 하는 구조라 과거엔 출입구로 대문 격이었다.
계류 건너편으로 보이는 침계루(枕溪樓) 편액이 걸린 건물인 도량 안 현판은 사자루(獅子樓)다.
정면 7칸 측면 4칸짜리 중층 누각인 사자루 안은 정진 거듭해 사자후 토해 낼 스님들의 학습 공간이었다.
현재는 수계식을 올리거나 참선법회를 연다고.
그만큼 무척 너른 공간이다.
송광사 너머 조계산 남쪽 자락에는 그림 같은 홍예문이 있는 태고종 총본산인 선암사가 있다.
아는 이는 다 알겠지만 부연하자면 선암사 승려였던 시조시인 조종현, 슬하의 4남 4녀 중 넷째가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작가다.
침계루(枕溪樓) 날 기다린 뜻은 /1992
수려한 풍광 배경으로 뿌리내린 고찰들. 거의 대부분 큰 절들은 깊은 산 그윽한 골에 계류 두르고 앉아있다. 대웅전 향하기 앞서 계곡 청수에 귀 헹구고 속진 떨구라는 배려일 게다.
조계산 내려와 송광사에 이르니 내처 따르던 거센 물소리가 우화각(羽化閣) 아래선 짐짓 조신해진다. 무심히 흐르는 물도 경내임을 알아채고 은연중 매무새 가다듬는듯하다. 이곳 역시 당우의 조화로운 배치만이 아니라 자연을 절묘히 운용했던 선대들의 세심한 안목과 지혜가 도드라져 보인다. 능허교(凌虛橋) 무지개다리 곡선도 우아하다.
다리도 쉬고 땀도 들일 겸 우화각 난간에 걸터앉는다. 혼자의 산행, 그리고 오후 한때의 이 푼푼한 한유로움. 신선이 달리 있을까. 비록 차 끓이는 동자 따르지 않아도 송풍회우(松風繪雨)의 경계 맛보며 삼매에 든 느낌이다. 문루 사이로 보이는 전각은 더욱 운치 있고 절문 밖 울창한 숲 어우러진 경관이 한참토록 내다보여 또한 좋다. 끊길듯하면서 시나브로 이어지는 인적 있어 고적하지 않은 산길.
가까운 데서 우렁우렁 반야심경이 들려온다. 소리가 밀려 나오는 쪽은 잿빛 기와지붕 드높은 옛 건물이다. 때마침 하계 선 수련회가 열리고 있는 고색창연한 누각엔 침계루(枕溪樓)란 편액이 기운차다. 이름 그대로 영락없이 계곡 베고서 높직히 올라앉은 침계루. 백일몽 대신 정진을 독려함인가, 용트림하듯 한 힘찬 기상 스민 枕溪樓란 서체도 그러하거니와 부지런히 흐르는 계류가 쉬지 않고 정진을 일깨운다.
그래서일까. 승보종찰 송광사는 예로부터 16 국사에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했다.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청정수도 도량으로 조계총림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 명분이야 어떠하든 잦은 종단 분쟁의 추태로 신앙에조차 환멸과 회의감 들 때면 청풍 소식으로 늘 위안을 주는 송광사가 아니던가.
이튿날 닿은 곳은 해남 대흥사. 초의 선사 자취를 찾아 나선 걸음이나 칠칠한 동백 숲과 천불전에 묶여 하루 해가 저물려 한다. 하긴 자유에의 갈증으로 떠나는 여행일진대 굳이 예정된 틀에 구속되고 싶지도 않은 터다. 일지암 방문은 일단 접어두고 가람 여기저기를 느긋이 둘러본다. 홰나무 그늘만 밟다 보니 기승부리는 매미 합창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다. 그 소리에 떠밀려 내려간 곳, 거기서도 뜻밖에 다시 침계루를 만났다.
감돌아 흐르는 물길 건너 대웅전은 있었고 그 들머리에서 재차 조우한 침계루 현판. 반갑고도 신기해 올려다 보고 거듭 또 올려다봤다. 이름에 반해 담박 마음에 새겼던 침계루인데 여기서도 대면케 되다니. 해수욕장 인근에 송도란 명칭이 흔한 것과 같은 이치인가. 사찰 양식의 기본 틀인지 몰라도 양쪽 다 누각 위치가 엇비슷하다. 게다가 큰 계곡 물소리에 걸맞게 힘이 느껴지는 글씨체조차 닮은 꼴이다.
침계루 올라 물소리에 온전히 잠겨 들고 싶으나 앞을 가로막는 외래객 출입금지 푯말. 대신 돌난간에 기대어 음계 투명한 청류의 청음을 듣는다. 물소리에 씻겨 조금은 정결해지고 순수히 다듬어지는 마음결. 사바의 티끌들 말끔히 털어낼 순 없다 해도 오염치 한결 낮춰질 듯하다.
그러고 보니 절 앞에 계류 깔아 둠은 수천 마디 법문 대신 모두에게 들려주는 자연 통한 무정설법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누군가의 시처럼 쉴 곳에 모이고 낮은 데로 내리며 빈 곳 채우는 겸허로, 흐르는 물살에 모든 오탁 죄다 씻어가며 살라 함이리라. 한순간도 머묾 없는 물처럼 뭇 집착에서 떠나라는 뜻이리라. 형상 없는 물이 되어 매이지 않은 자유인으로 살라는 가르침이리라. 나아가 하늘과 땅을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순환 거듭하는 물에서 윤회의 모습 읽으라 함이리라.
마치 예비된 만남처럼 침계루 거기서 날 기다렸음은 이 이야길 들려주고자 함이었나 보다. 1992
계류 건너편 침계루(枕溪樓) 편액이 걸린 건물, 동일 건물이나 도량 안 현판은 사자루(獅子樓)
위치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