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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여정수첩 14-평사리 소 눈망울에 겹친 빈센조

by 무량화


박경리 선생의 <토지> 무대인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를 찾은 날, 하필이면 대기 질 최악이었다.

피아골에서의 둘째 날, 새벽 일찌감치 깨어났다.

높고 예리한 꿩 소리 덕분이었다.

꿩이란 이름조차 울음소리를 본뜬 의성어란 말대로 꿔걱! 단음으로 꿩소리 날카로이 울려서다.

꿩 소리가 들려온 골짜기를 올려다보았다.

자욱하게 그러면서 스멀거리며 안개가 밀려 내려왔다.

필시 숲안개려니 했는데 점점 부옇게 시야 흐려지며 안질이라도 걸린 듯 산자락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가시거리가 짧아지면서 건너편 산봉우리 희미해졌으나 혼탁해진 대기 개의치 않고 평사리로 향했다.

제주를 제외한 전국 16개 시도에 황사 '주의' 경보가 발령됐다는 뉴스 기사를 아들이 카톡으로 보내왔다.


하필이면 전국 그 어디보다도 우리가 이동하고 있는 전남북과 경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미세먼지 농도 <매우 나쁨>이 표시돼 있었다.


뉴스는 '황사 발생 대비 국민행동 요령'을 숙지·실천할 것을 당부했다.


가정에서는 창문을 닫고 가급적 외출을 삼가고, 외출 시 보호안경 및 마스크를 착용하며 귀가 후 손과 발 등을 깨끗이 씻으라 했다.


노약자나 호흡기 질환자의 경우 실외활동을 자제할 것을 강조했다.


그제야 비로소 미세먼지가 굉장한 날인 줄 알았지만 일단 나선 걸음, 계속 목적지로 달렸다.


평사리에 도착해서도 우리 팀은 70대 계층의 노약자에 속하기에 KF99 마스크를 단디 쓰고 다녀야 했다.


고향마을 같은 황토 풀숲에 고샅길 구불텅 이어져 있었다.



최참판 댁 사랑채 누마루에서 내려다본 악양들은 너른 품섶만 짚일 뿐, 도도한 섬진강마저 모호할 정도로 전체적 윤곽은 희미했다.

대신 초가지붕 이마 맞댄 아랫마을 사람들, 최 씨 집안의 토지에 매달려 사는 소작농들의 토방엔 봄볕 다사로이 내려앉았다.

토담가에 앵두꽃 사과꽃 탱자꽃 배꽃이 피었으며 보리밭 푸른 물결 옆에는 완두콩꽃도 피어있었다.

용이네인지 오서방네인지 초가삼간에 잇대어 지은 외양간 소의 순하디 순한 눈망울에 사로잡혀 한참을 서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에 어질어 빠진 검은 눈동자는 순진무구하게 선해 보이며 한편 무심한듯하면서도 수줍었다.

순진한 아가 눈빛이 머루알 같다면 최근 홀려버린 드라마 빈센조에서 송중기의 눈빛이 송아지의 저 눈빛이었던 것 같다.

여기에다 틈새 없이 두루 완벽한 빈센조, 도회적인 시크한 멋에 더해 지적으로 냉철함까지 갖춘 그의 눈빛 연기는 가히 일품이었다.

누구라도 무장해제 당하게 되는 그런 눈빛을 가진 젊은이 빈센조를 떠올리게 하는 소 눈망울, 그 아름다운 눈빛 오래 바라보려고 사진에 담았다.

실은 녀석이 자꾸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꿈뻑대는 통에 여러 번 만에야 겨우 한 장, 외양간 틈새로 찍은 사진이다.

미세먼지가 극성부리는 와중이라 지리산 자락도 섬진강 줄기도 가물가물, 소 눈망울만 영롱한 별빛으로 기억될 평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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