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Apr 22. 2024

그해 카리조 평원

야생화


야생화 소식이 전해지는 봄이면 봄마다 하도 듣고 보아와서 친숙해진 카리조 평원이다. 겹겹이 굽이친 산록마다 환상적인 파스텔화를 그려낸 사진들이, 어서 그 대열에 끼라고 손짓하는 통에 은근 조바심마저 일었다. 하늘색 꽃인 베이비 블루아이, 퍼플빛인 루핀과 라벤더, 주황색 파피, 하얀 데이지, 연미색 크림 컵, 진노랑 골드필즈가 무리 지어 아른아른 연연하게 일렁거리는 야생화들의 축제장인 그곳. 드디어 사월 한복판, 기대하고 고대하던 그 여정에 합류했다. 다른 어느 해보다 비가 흡족하게 내린 대지, 덕택에 올봄은 들녘마다 푸르름 깊었고 들꽃들은 마음껏 흐드러졌다.  


컨 카운티의 초대형 유전지대를 끼고 산자락 휘도는 58번 도로가 모롱이를 돌자마자 지금까지의 황막한 풍경과는 전혀 다른 신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윤기 흐르는 잡초무리는 푸른 보리밭이랑처럼 물결 졌고 완만한 능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노란빛 야생화는 대형 화판의 수채화 그 자체였다. 사진에서 전에 본 바와는 달리, 보라꽃이나 흰꽃은 섞이지 않은 순일한 진노랑 일색이었다. 연신 환호를 발하며 언덕길을 내려서니 시야가 탁 트이면서 이번엔 광대무변한 평원 가득 유화 화폭을 펼쳐놓았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노랑 빛무리가 온 데서 일렁거렸다. 점묘법의 화풍처럼 수천억의 작은 꽃송이들이 점점이 찍힌 그림 액자가 사방 어디에나 끝없이 널려있었다. 풀 내음인지 꽃향기인지 풋풋하고도 싱그러운 향이 살푼살푼 번졌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멜로디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노랫말 그대로 주님의 권능이 우주에 가득찼음을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뉘라서 한 포기 풀에 생명 깃들여 줄 수 있겠으며 미소한 꽃 한 송이인들 피워낼 수가 있으랴. 시편에서 읊듯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 행복하여라를 절절히 온몸으로 감지하자 전율이 흘렀다.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며 질서 있게 자리하도록 섭리하시는 권능의 하느님, 그분만이 세세생생 영원하신 분. 눈을 밝혀 이 순간 당신을 느끼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늘 향해 두 손 합장, 거듭 경배를 올렸다. 그리고 야생화 축제에 동참케 해 준 이웃에게도 마음으로 고개 숙여 고마움을 보냈다.


Carrizo Plain National Monument는 2001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국립기념물로 선포된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의 대단지 평원이다. 아득한 옛 옛적엔 영양 등 초식동물들이 무리 지어 유유자적 풀을 뜯던 목초지였다. 25만 에이커에 달하는 길고 넓게 뻗은 광대한 초원 중앙에는 Sada Lake이라는 알칼리성 소금 호수가  자리했다. 유출구 없이 갇힌 호수의 물이 자연 증발되면서 둘레에 흰색 퇴적물을 남겨, 마치 샛노란 야생화가 눈 속에 핀 양 기묘하게 대비를 이뤘다. 산에 둘러싸인 널따란 분지, 이따금 흙먼지를 보얗게 일구며 달리는 자동차 소리와 사통팔방 자유로운 바람 소리 외에 사위는 평화로운 적막에 잠겼다. 전화기도 인터넷도 불통인 오지 아닌 오지인 이곳. 한나절 누린 세상과 차단된 절대고립감은 그러나 뜨악하고도 생경스러웠다. 그만큼 세상 소음과 소통의 연결고리에 은연중 길들여진 우리였다.


여기서 놓칠 수 없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Painted Rock이다. 기원전 2000 년경 추마시 원주민들이 사암에 새겨둔 그림문자인 Painted Rock이 소다레익 저편에서 기다리는데 이곳은 예약이 필요했다. 또 한 곳, 안드레아스 단층이 가로지른 월리스 크릭을 찾으면 어긋진 지층의 단면을 육안으로 목도하게 되는 트레일이 있다고 한다. 북쪽에서 넘어와 남쪽 방향으로 택한 귀갓길, 도로 양 편엔 여전히 끝 모르게 이어지는 야생화 물결이 출렁였다. 난생처음 접한 일망무제의 야생화 잔치에 가뜩이나 멀미를 일으킬 지경인데, 안 그래도 경운기를 탄 것처럼 출썩대는 비포장도로가 무려 20마일, 한 시간여 이어졌다. 울퉁불퉁 하긴 해도 곧장 뻗은 166번 도로 좌우로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시골 정경은 퍽 목가적이었다. 현요로운 꽃길이 오래 이어지다가, 무덤덤한 구릉지대였다가, 소떼가 풀을 뜯는 목장이었다가, 불현듯 솟구친 장쾌한 기상의 산봉우리였다가, 지금은 버려져 인적 끊긴 폐광터였다가, 한적한 농가 몇 채가 스치기도 하였다. 카리조평원을 드디어 나도야 가봤노라, 흡족한 기분으로 그 길을 달리며 아리아리 그윽한 오수에 취해 들었다.   

주소: 17495 Soda Lake Rd, Santa Margarita, CA 9345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