섶섬 문섬이 떠있는 자구리 앞바다.
고단한 피난살이 중임에도 중섭 가족은 이 바닷가에서 게를 잡으며 놀았다.
낡은 초가집 구석방에 중섭 네 가족 깃들어 오순도순 살 비비며 지내던 그때.
마당귀에 선 키다리 멀구슬나무 연보라꽃 폈을까?
담장가 아담한 목련나무와 정낭
옆 벚나무야 당시도 있었을까 싶잖지만.
지붕 위로 넓게 드리운 목련화 소담스레 피어났다.
겨우내 가지 끝 꽃눈 벙글어 함초롬 봄 언약 맺더니
깊이 여민 상아빛 속살 보일락 말락.
드디어 서두름 없이 아주 느릿느릿 옷고름 살몃 풀었다.
옷고름에 이어서 치마끈 당기니 조끼허리에 어깨선 보얗게 드러난다.
순수무결한 고아한 자태 혼몽이듯 눈부셔, 차마 마주 보다가는 그만 혼절해 버릴 듯.
아득하여라, 잠시 머물다 해풍 한자락 홀연 스치매 순식간에 하르르 져버릴 꽃이파리.
가벼운 산책 삼아 이 길 수시로 지나는지라 목련 봉오리 부풀어오를 적부터 눈길 간 이중섭 거주지인데 드디어 초가지붕 덮을 듯 만개한 목련화다.
바람 다스리는 영등할망 심술인지 유독 바람 잦은 철이라 목련화 송이 잠시도 고요롭지 못한 채 뒤채이는 밤.
찰나이리라, 그렇게 금세 이울 목련화이리.
그 후 꽃이 완전히 질때까지 얼마간은 근처 길로 다니지 않았다.
하늘하늘 꽃이파리 날리다가 그예 무너지듯 쏟아져 내리는 목련의 비장한 낙화 장면 마주치기 싫어서였다.
이중섭거리 중허리쯤에 있는 서귀포극장 맞은편 골목길로 꺾어 들어 자구리바다에 가곤 했다.
이 골목길은 이중섭 그림골목으로 불린다.
태평로 371번 길 주택가 양쪽 바투게 자리한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짧은 화가의 생애 가운데 그나마 가족들과 함께 지내 따스했던 시기로 기억되는 서귀포 시대 그림들이다.
비록 피난살이 고단했음에도 자구리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게를 잡으며 행복했을 그.
여기서 섶섬 풍경을 그렸고 서귀포의 환상을 남겼으며 은박지에 꾹꾹 눌러서 그린 물고기와 아이들은 천진스러웠는데.
고작 11개월의 족적일 뿐이지만 11년 아니 평생을 지낸 자취 이상으로 서귀포에 남긴 공 지대한 화가 이중섭이다.
여기서 특별히 기릴 이름이 있으니 1995년 초대 민선 시장에 당선된 오광협 서귀포시장, 그분의 남다른 혜안을 회고해 본다.
제9대 서귀포 시정을 책임졌던 오 시장은 이중섭 거리를 만들어 불행했던 천재화가의 신화창조에 앞장섰던 분이다.
전쟁통에 서귀포 바닷가에서 단지 11개월 머문 인연 뿐인 화가 이중섭이다.
월남 후 여러 지역을 부평초처럼 떠돈 이중섭을 문화 콘텐츠화 시켜 지역 관광 확장에 큰 보탬을 준 행정가였던 분이 오광협 시장이다.
오 시장은 서울, 대구, 부산, 통영을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한 이중섭의 서귀포에서의 11개월을 발 빠르게 브랜드화시켜 그를 문화 아이콘으로 선점했다.
덕택에 풍광 좋은 관광지이자 문화가 있는 관광지로 서귀포는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몇년전 작고하신 그분은 만학도로 관광경영학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받은 분다이 관광과 경영을 접목, 미래를 내다보는 뛰어난 행정력을 펼친 분이셨다.
물론 오시장님을 비롯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한 결과물이나, 뭐든 초안이 되는 발상 자체가 중요.
그분 덕에 서귀포시는 이중섭거리에서 여러 수혜를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리.
이중섭 그림골목의 모든 벽화가 그의 작품들로 채워졌지만 한라산 설경은 그의 그림은 아니지 싶다.
기와를 인 담장이 자연스럽게 산자락으로 마무리된 절묘한 재치가 돋보여 일부러 벽화를 손으로 쓸어보기도 하였다.
언덕길이 끝나며 벽화도 끝이 났지만 이중섭의 예술혼은 승화된 그리움으로 피어나 여전히 이 거리에서 살아 숨 쉬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