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지?
창작오페라 《서귀포의 환상》에서 이중섭을 놓쳤다.
어쩌면 인간 이중섭은 모른 채 신화가 된 화가 이중섭만 알았더라면 오페라에 몰입할 수도 있었을 터.
지난해 같은 작품을 보며 느낀 동일한 감정이 올해는 불편 정도가 아니라 혼란감 심하게 들었다.
사십 대 이중섭의 모습이 도대체 어느 구석에서도 아니 찾아져서였다.
오페라 가수도 실제 배역에 준해야 분장을 해서라도 어지간히 주인공 분위기를 내련만.
대체로 성악가들 목소리는 몸통에서 나온다지만 배역과 언밸런스되는 외형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기막힌 목소리의 마리아 칼라스도 거구인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려고 혹독하게 체중 감량을 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아리아를 소화해 내기 위하여.
오페라는 음악이 전부가 아니다.
알맞은 의상과 적절한 세트가 갖춰진 무대에서 가수의 노래와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 곧 종합공연예술인 오페라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짧달막한 키, 반면 키다리에다 세련되고 중후한 외형을 가진 이중섭이다.
화가 역을 맡은 성악가는 뛰어난 가창력으로 새롭게 캐스팅되었을 테지만 이중섭은 무리다.
최소한 이중섭의 나이만 감안했어도 그 같은 배역이 허용되기 어려우련만.
1916년에 태어나 1956년 고작 사십 나이에 눈을 감은 이중섭이니 청년기에서 장년 즈음의 배역이다.
한국동란 발발로 어머니와 작별할 당시의 그는 삼십 대 중반, 한창때인데도 불구하고 오십도 넘은 중년 사내 같다면?
후리후리 키가 크고 잘 생긴 멋진 외모를 지닌 그는 배우 이정재와 흡사했다니 알만할 정도의 준수한 모습이겠다.
더구나 그 시기 무렵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한창 좋은 시절에 해당된다.
미도파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당시도 채 사십이 안된 그.
경찰이 들이닥쳐 춘화라느니 빨갱이 운운하며 소동을 벌이자 주저앉은 채 쭈그린 그의 모습은 육십도 넘은 늙은이 같았다.
그의 무력감과 허탈감과 절망감, 아니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듯 고뇌에 차 머리를 감싼 그로의 감정이입이 도무지 어려웠다.
가령, 황폐해진 정신세계일지라도 가장으로서 사무치게 그리운 가족을 두고서도?
치열한 예술혼으로 황소 그림을 그린 이중섭이라면 그렇게 쉽게 맥없이 좌절하고 무너져 내릴 수 있을까.
비극적인 시대 상황과 자신의 참담한 현실에 좌초 당해 점차 피폐해진 심신이라 불감당이었던가.
결국 조현병이 깊어지며 그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중섭.
아마 갈옷 색감의 헐렁한 무대의상 탓일지도 모르겠다.
얼핏 얼핏 변시지 화백이 겹쳐지는 이유는.
황토와 검정 톤으로 칠해진 화면을 메운 변화백의 절절한 고독감, 문득 사무쳐온 까닭이리라.
한국전 발발로 1950년 12월 월남을 한 이중섭 가족은 피난살이 다 그러하듯 모진 궁핍을 겪어야 했다.
부산 범일동 산복 도로 언덕배기 피란민촌에서 '범일동 풍경'과 '문현동 풍경'을 남긴 부산시대의 이중섭.
제주도에서 건너온 1951년 12월부터 1953년 말 통영으로 가기 전 부산에 머물 때인 1952년 7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그가 살던 판잣집 동네엔 현재 이중섭거리와 마사코 전망대가 들어서 현해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다.
예향 통영 시대는 이중섭의 르네상스기, 가족과 이별한 후 상실감을 이겨내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던 1953년부터 1954년까지 거주했다.
'충렬사 풍경', ‘세병관 풍경’, ‘선착장을 바라다본 풍경’ 등 약 30여 점의 작품을 남긴 통영시대에서 진주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진주 출신의 박생광 화백은 54년 5월경에 이중섭과 진주 변두리 절집에서 한 달가량 숙식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경남 진주는 소싸움이 유명하기에 어릴 때부터 소와 친한 박생광, 이중섭은 <진주 붉은 소>를 우정의 표시로 그에게 그려 주었다.
시인 구상의 주선으로 대구에 내려온 그는 의사인 구상 아내가 개원한 왜관과 대구를 오가며 육 개월 정도를 머물렀다
'구상의 가족'과 '왜관 성당 부근' 및 '동촌 유원지'와 '낙동강 풍경'으로 이중섭의 흔적이 대구 곳곳에도 남아있다.
소설가 김이석의 집에서 육 개월가량 곁방살이를 하며 열정적으로 미도파 화랑 전시회를 준비했던 누상동시대도 있었다.
1954년 6월 무렵 서울 누상동에서 머물며 그는 '그림이 내게 있어서는 나를 말하는 수단밖에 다른 것이 못 되는 것'이라 탄했다 한다.
한국전쟁으로 남한에 내려온 5년여 세월 동안 부평초처럼 각지를 떠돌며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가 정신 병동에서 마침내 눈을 감은 그.
한번 더 거론하지만 서귀포시에서는 탁월한 안목으로 다른 어느 지역보다 먼저 이중섭의 가치를 정확히 읽어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1995년 초대 민선 시장에 당선된 오광협 서귀포시장은 남다른 혜안으로 이중섭 거리를 만들어 불행했던 천재화가의 신화창조에 앞장섰다.
전쟁통에 단지 11개월 머문 인연일 뿐인 한 화가.
위에 열거했듯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돈 이중섭을 문화 콘텐츠화 시킨 오 시장은 이 지역 행정가였다.
오광협 시장은 발 빠르게 이중섭의 서귀포에서의 11개월을 브랜드화시켜 그를 문화 아이콘으로 선점했다.
이중섭은 그 후 2016년 창작오페레타로 부활해 발전에 발전을 거듭, 여러 차례 공연되며 서귀포 대표 문화 상품으로 부상하였다.
창작오페라 이중섭, 그간 물론 오페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고심한 연출가 작곡가를 비롯 스태프진의 노고 컸으리라 여겨진다.
배역 선정 외에도 누상동 화실 배경인 눈 내리는 인왕산, 겨울 하늘에 여름철 구름 두둥실 흘러가는 옥에 티 하나라도 문화관광과 담당자는 과연 짚어냈을까.
그럼에도 맥락은 다르지만...
가령, 도청 산하 부서에서 창작 연극을 발표했을 경우를 상정해 보자.
도청 소속 서포터스라면 연극 리뷰에 당연히 극찬과 함께 추천글을 쓰며 후한 점수부터 준다.
좋았던 점과 장점만을 미사여구 동원해 포장,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평가 일색으로 적극 홍보에 앞장설 게다.
반면 시민기자 위치라면 주관적인 견해 또는 소감이나 느낌을 솔직 담백하게 드러냄으로써 객관적이고도 자유로운 지적, 비판을 해야 할 게다.
어딘가에 소속된 공식 블로그 게재 포스팅이 아니라 극히 개인적인 블로그라면 그 어떤 틀에 매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블로그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오피니언 개진과 주관적인 평가 혹은 후기인 리뷰가 허용되는 장이다.
고로 악의적이고도 고의적인 비난 및 지적질이 아닌 이상 리뷰어에 대해 선을 넘는 간섭은 자유권 침해다.
내 생각을 기록해 올리는 일지에 대해 가타부타 또는 왈가왈부할 귄리는 누구에게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