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산 호세는 이름에서부터 내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할만한 곳이었다. 남편의 세례명은 요셉이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성가정을 이루라며 요셉과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주셨다. 내심 어느 하세월에 성가정이 되겠나 생각했는데, 실로 신묘한 하늘의 섭리를 어찌 감히 우리가 헤아리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조차, 아들을 주겠다는 축복의 언약을 듣자 나이 많은 자신이기에 속으로 웃었듯이. 성당에 다니면서 놀라울 정도로 남편을 변화시킨 성령의 은총은 간증감이지만, 그 모든 일들은 마음에 새겨 간직하기로 한다. 성가정을 이루라 축성받기 이전, 그 길로 들어서는 계기를 진작에 마련해 놓고 기다리신 참 좋은 하느님이신 것을.
마태오복음에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약혼녀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스캔들로 율법에 따라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며 처형당할 것을 우려하여, 남몰래 그녀와 파혼하기로 결심한 요셉.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아들을 수태했노라고 말한다. 천사는 성령에 의해 아기가 잉태되었음을 알리며, 그의 이름을 예수라 지으라고 명하자 요셉은 마음을 돌려먹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인간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요셉은 마리아와 더불어 하느님의 직무를 돕도록 부름 받은, 믿음 깊고 흠없이 경건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터다.
호세,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쥬세페로도 불리는 요셉(Joseph)은 히브리어 ‘더하다’에서 비롯되었다. 요셉은 나자렛의 목수로서 다른 사람들처럼 매일 노동에 힘쓰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통사람 요셉은 하느님께서 큰 일을 맡기신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마리아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 구원 계획에 절대적으로 순명하고 협력한 요셉. 그분은 한국교회의 수호성인이며 성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는 신앙인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또한 요셉 성인은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다. 사회 정의를 수호하는 분이자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이들의 주보로, 5월 1일은 ‘노동자 성요셉 기념일’이다. 상징물은 꽃이 핀 나무 지팡이와 목수의 도구인 톱과 망치 등이다.
mission-san jose는 샌프란시스코만 내륙 쪽의 프레몬트 북쪽에 위치했다. 왕의 길인 El Camino Real을 따라 만들어진 알타 캘리포니아의 스물한 개 미션 중 14 번째로 건립된 미션이다. 미션 산 호세는 비옥한 땅과 충분한 물 덕에 삼 년 만에 크게 성장, 산업과 농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많은 원주민들이 미션에 모여 살기 시작했으며, 비록 강압적이긴 했지만 새로운 삶의 방식울 배워나갔다. 여러 종의 가축을 길렀으며 밀 등 농작물을 수백 에이커의 농지에서 경작했다. 모든 미션이 그러하듯 원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시키면서 동시에 스페인 식민정책에 맞는 신민을 만들 목적으로 Lasuen 선교사에 의해 1797년 세워진 미션 산 호세다. 독립 선언을 하였던 1776년 당시의 미국은 대륙 동부에만 영향력을 미쳤을 뿐, 캘리포니아 연안은 전적으로 스페인의 독무대였다. 해서 미션 이름마다 스페인어로 굳어졌는데 산 호세(San Jose)는 영어로 St. Joseph이 되겠다.
mission san jose를 찾아가는 길은 로컬 도로답지 않게 정체가 아주 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리콘밸리가 가까워서였다. 짧은 겨울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미션은 대부분 다섯 시면 문을 닫는다. 미션 스트릿에 들어섰는데도 정작 미션표지판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새 해는 꼴깍 졌다. 금세 어둠살이 퍼졌다. 가로등이 어둑신한 가로를 비췄다. 그때서야 저만치 예의 그 곰 표시가 나타났다. 주차를 하고 미션 정문 쪽으로 달려갔다. 문은 잠겨져 있었다. 담장 너머 뒤뜰 묘역의 대리석 십자가 머리 부분만 보였다. 건물 외곽으로 돌며 어슴프레 드러난 푸른 윤곽의 미션 전경을 사진에 담았다. 동행인의 순발력 있는 기지로 청소하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 기프트 샾 출입만은 허용됐다. 미션 내부는 포기하더라도 박물관만이라도 둘러볼 수 있다는 게 흔감스러웠다.
원래 프레몬트 지역은 Ohlone 원주민의 주거지였으므로 전시실에는 그들의 생활상이 담긴 벽화나 유물이 다수 전시되어 있었다. Ohlone 부족은 수렵채취생활을 했다. 그들은 식물의 씨앗, 뿌리, 열매 등과 작은 동물이나 물고기를 잡고 조개를 채집해서 먹고살았다. 자유분방하게 들로 산으로 옮겨 다니며 유목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은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지 않았으므로 종종 미션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와 곤욕을 치루기도 하였다. 미션에서의 하루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일출시간부터 시작되었다. 모두를 깨워 아침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다음 다 같이 아침밥을 먹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으니, 강제로 해야 하는 규칙적인 생활방식이 유목민에게 맞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하늘 제단에 바친 신부들 역시도 누더기진 잿빛 수도복을 걸친 채 함께 일하고 기도했다. 지금도 왜관 베네딕도수도회 수사님들 슬로건은 '기도하며 일하자(Ora et Labora)'이다. 불교계 또한 일일부작 일일불식 (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 하여 노동의 가치를 귀히 여긴다.
표준 사각형 모양으로 지어진 나무지붕의 초기 미션은 1808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이에 어도비 양식의 새 교회를 지어 1809년에 성대한 의식 속에 재헌정되었다. 미션 산타 클라라가 창립선물로 보내준 양 떼로 시작, 가축 무리가 늘어났고 포도원과 올리브 무화과 과수원도 생겼다. 미션이 계속 성장함에 따라 비누 및 양초공장과 제혁, 제분소도 운영하였다. 1833년 당시 미션 산 호세는 가장 번창한 미션 중 하나였다. 교회 재산 목록에 따르면 수천 에이커의 농지와 목초지 외에도 교회 건물, 수도원, 작업실, 원주민 주택, 대장간, 창고 등 부속건물이 수십 동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듬해 멕시코 정부의 세속화 법령에 의해 미션은 폐쇄되었다. 겨우 안정되어 가던 공동체는 깨어져버리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모듬살이를 하던 원주민들의 삶 터는 목장으로 나뉘어 팔려버렸다. 이곳 역시, 지역 사령관이던 Vallejo에 의해 귀중품은 거의 다 걷어간 상태라 막상 팔려고 내놓는 것은 토지뿐이었다. 1846년 피오 피코 주지사는 그의 형제인 Andre Pico에게 헐값인 1만 2천 불에 미션 전부를 양도했다. 미국과 멕시코 전쟁이 끝나자 1848년 알타 캘리포니아는 미국에 양도되었다. 인근이 골드러시로 흥청거리는 동안 미션은 상점, 선술집, 숙박업소가 되기도 하는 등 수모를 겪다가 1858년에 이르러 미국 정부는 미션을 가톨릭 교회에 반환했다. 1868년에 발생한 진도 6이 넘는 Hayward 지진으로 미션은 다시 크게 파손됐다. 지진 후, 프랑스인 페더리 신부가 재건하여 1965년까지 교구 교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85년, 산호세 선교위원회와 오클랜드 가톨릭 교구가 세속화 직전과 같은 양식의 어도비 교회 복제본을 바탕으로 재건축하였으며, 캘리포니아 역사 랜드마크 334호로 지정되었다.
미션 산 호세를 떠나기 전, 아쉬움에 분수대 주변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짙푸르게 깊어가는 야기(夜氣) 속으로 퍼지는 분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계곡 물소리처럼 청량했다. 그뿐 누리는 절대정적에 싸인채 더없이 고요했다. 환청일까. 어둠 속에서 올려다본 미션 십자가 아래 종탑의 종이 당그랑 뎅뎅~ 풍경소리로 우리를 전송해 줬다. 아늑하고도 평화로운 밤이었고 감사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