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쾌청하던 엊그제.
성산 일출봉에 올랐다.
며칠 전에도 다녀온 일출봉을 거푸 다녀온 데는 까닭이 있었다.
서귀포 산야마다 물오른 눈엽 연연했는데 사월 초 일출봉 분화구는 아직 누르스름해, 기대치에 못 미쳤다.
곧 충청도에서 지인이 방문하는지라 봄물 푸르게 오른 성산 일출봉을 보여주고 싶었다.
해서 신록 어느 정도인가 답사차 간 일출봉이다.
시기가 시기인 만치 수학여행 온 단체 학생들로 등산로가 제법 붐볐다.
일출봉에 올랐더니 때깔 고운 고려청자 접시같이 분화구가 곱고 멋졌다.
옳거니, 일 주간 머무는 그녀라 함께 등반하기 안성맞춤이군.
산을 내려와 오조리 내수면을 빙 돌아서 수마포 해안으로 걸어갔다.
간조 때인 듯 내수면 바닥이 거의 드러나 있더니 수마포 바닷물도 저만치 밀려나갔다.
바다 위로 훤히 드러난 너럭바위에 엎드려 사람들이 무언가를 채취하고 있었다.
바위로 이어진 통로 쪽 해암 건너뛰며 가까이 다가갔다.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는 바위는 미끄러질 염려가 없는 현무암이라 해조류만 조심하면 된다.
널펀펀한 마당바위에 빈틈없이 좍 깔린 게 전부 다 톳이었다.
바다 품속에서 오롯이 자란 순수 자연산인 풋풋한 톳.
그만큼 많이 깔린 톳을 보기도 첨이다.
암반에 웅크린 채 다들 톳을 뜯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을 어촌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어장이냐고 물어봤더니 아니란다.
다른 이들은 장화를 신고 마대를 들고 와 낫으로 채취를 하지만 아무런 사전 준비가 안 된 터.
배낭에 든 간식 넣었던 봉투를 꺼내 톳을 맨손으로 뜯었다.
봉투를 빵빵하게 채운 다음 여섯 시 반 넘어 귀로에 올랐다.
바다가 선물한 톳을 흐뭇하게 들고서.
이튿날 그녀가 당도했다.
나름 준비한 저녁상을 차리며 데쳐놓은 톳도 접시에 담았다.
단출한 살림이라 무침을 하기 번거로워 초고추장을 곁들여 내놨다.
당뇨가 있어서 평소에도 톳만 보면 사 왔다는 그녀는 이처럼 연하고 통통한 톳은 처음이라며 접시를 비우고 더 청하기까지 했다.
여태껏 접한 톳 중에서 가장 뛰어난 품질의 톳을 서귀포 바닷가에서 만났다며. 약 삼아 계속 먹던 그녀.
톳을 그리 반기다니 그럼 직접 따러 갑시다.
다음날 우리는 비자림을 거쳐 늦은 시각 성산에 닿았다.
물때를 맞추려고 일부러 오후에 움직였던 터다.
엊그제 여섯 시 반경에 톳을 땄으니 그 시간대에 맞춰서 왔는데 아직도 검푸른 바닷물 그들먹한 채 톳이 깔렸던 바위는 가뭇없이 자취 감췄다.
물이 빠질 때를 기다릴 겸 초입에 있는 진지동굴을 둘러보러 내려갔다.
기상 조건은 다크 투어리즘에 딱 알맞았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다 바람조차 심했다.
그녀는 춥다며 구경이고 뭐고 손사래 치면서 앞장서 이층 카페로 올라갔다.
눈 빠지게 썰물 때를 기다리며 우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눈 아래, 며칠 전 톳을 딴 바윗전에 파도 허옇게 일고 있었다.
철썩대는 파도소리가 카페까지 따라붙었다.
실내는 따스했다.
펍을 겸한 카페라 칵테일을 주문했다.
그녀는 모히토, 난 마가리따를 시켰다.
카페 조명빛이 더 밝아졌다.
느긋하게 한잔 하며 간간 바다를 내려다봤다.
방파제 위에서 낚싯대 드리운 낚시꾼 두엇은 조황이 좋은지 바다 향한 돌장승처럼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철썩철썩 파도만 일뿐 물 빠짐 속도는 거의 충청도식으로 아주 느려터졌다.
조금씩 바위전이 드러나는가 싶지만 여전 그 타령, 썰물은 도무지 속도가 붙지 않았다.
청남빛 수평선에 어선이 밝힌 집어등 점점이 떠올랐다.
사방에 어둠 스밀 때까지 카페에 앉아 있었지만 바위가 완전히는 드러나지 않았다.
점차 깜깜해지는 밤바다를 내려다보니, 톳이 어서 오라고 등 들고 손짓한대도 겁이 나 내려갈 엄두 못 낼 판.
썰물만을 기다리던 우리는 결국 포기하고 톳 채취를 뒤로 한채 약간 거나해진 기분으로 수마포에서 철수했다.
구름장 사이로 가끔씩 둥근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희미하게 달무리 진 만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