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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무량화
Apr 25. 2024
테하차피 그 절
자신의 신앙이 소중하다면 나와 다른 종교관이라 하여 배타적이기보다 기꺼이 인정하고 존중해야...
Taegosa: Tehachapi in California USA
태고사는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의 태하차피란 곳에 있는 한국 전통사찰이다.
<테하차피의 달>이란 조갑상교수의 단편소설집이 있다는 건 거길 다녀온 후에야 안 사실이거니와 진작에 알았다면 태고사를 필히 찾아봤을 터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날 우리의 조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이 들어 슬슬 채마밭이나 일구어 딸내미에게 손수 가꾼 싱싱한 소채를
대어 줄만한 거리에서 노후를 지내려고, 그때 나는 따스하고 한적한 은거지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던 중이었다.
한 농장주의 소개를 받고 테하차피엘 들렸으나 공기는 맑았지만 산자수명하기는커녕 티베트고원보다 더 삭막한 대지에 강풍 심하게 휘몰아쳐대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던 거기 대규모 풍차 단지만이 인상적이었다.
일찍이 인디언 시절부터 바람의 언덕이란 지명이 붙은 곳으로 거친 바람뿐이라 저으기 실망만 안았던 기억.
그간 줄곧 가든 스테이트라 불릴 정도로 푸르른 숲이 아름다운 지역에 살고 있었던 터라 어디에도 시선 둘 곳 없이 황량한 사막지대의 살풍경한 정경이야말로 헛헛한 적막강산 그 자체 같았다.
눈길 닿는 어디든 생명의 푸른 기운이 조금치라도 느껴지는 곳, 청청한 세쿼이어도 자라는 곳을 기대했으나 테하차피엔 비비 꼬인 채 말라가는 볼품없는 사막지대의 풀포기나 죠수아트리뿐이었다.
그렇게 주변 언저리를 샅샅이 훑었던 그날.
태고사를 심상히 스쳐 지나버렸던 것은
새로운 구경거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서 어디든 쫓아 나서는 자신인데 그날 진종일 열사의 땅을 돌아다니다 보니 심신이 워낙 지쳤던 때문이기도 했다.
테하차피를 다녀와서 얼마가 지난 후 뉴저지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종종 그랬듯이 한국에서 아들이 큼지막한 책꾸러미를 소포로 보내왔다.
여러 서적들 중에는 오래전에(99년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로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는 미국인으로 불교에 귀의한 현각스님의 책 두 권도 들어 있었다.
예일에서 문학과 철학을,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하던 중 자그마한 동양인이 들려준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설법에 매료되어 화계사 조실인 숭산스님을 따라 출가한 푸른 눈의 승려 폴.
숭산스님을 만나 비로소 삶의 나침판을 찾았다고 고백한 미국의 젊은 지성 폴은 현각이 된다.
지금은 한국의 유명세에 따른 뭇 대중의 관심에 질려버려 독일로 훌쩍 떠났다는 현각스님이다.
그의 책을 읽다가 중간쯤에서 태고사 얘기를 다시 듣게 되었다.
아차~ 그때 왜 미국땅에 지어진 우리의 전통사찰을 목전에서 그냥 흘려버리고 말았던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차피 캘리포니아로의 이주를 계획하고 있으니
언젠가의 후일을 기약한 채 아쉬움을 접어두기로 했다.
다음은 현각스님의 글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와 무량스님이 쓴 <왜 사는가>중에서 부분 발췌 참조하여 작성한 글이다.
태고사는 무량스님이란 미국인 승려가 모하비 사막의 산자락에 지은 한국식 단청을 입힌 사찰이다.
즉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끼리 귀를 맞춰 짓는 전래의 사찰 건축방식대로 지은 순 나무집이다.
현지에 사는 인디언 노인의 말에 의하면 예부터 '성스러운 독수리 터'라 불렸다는 그곳.
예전에도 각지에 흩어져 유목생활을 하던 인디언들이 겨울이면 본향에 돌아와 대자연과 조용히 어우러진 채 자아를 찾아 관상수도를 하던 이른바 전통 깊은 수행터가 태고사 자리란다.
태고사의 원래 정식 명칭은 Mountain Spirit Center였으나 지금은 Dobongsan Taegosa, Inc. 도봉산 태고사란 비영리법인체로 등록이 되어있다고 한다.
현각스님이 책 속에 <나의 도반>으로 소개한 몇몇 국제선원의 스님 중 한 분인 무량스님은
미네소타 출신으로 변호사의 길 잇기를 바라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예일을 마친 3년 후 큰스님을 따라 한국에 가 출가를 했다.
스님이 되지 않았으면 히말라야에 들어가 요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그.
더구나 그는 외아들이었으니, 청정비구가 되어 결혼을 접자 아버지의 충격이 어떠하였을지 대충 짐작된다.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에릭이란 이름으로 엘리사라는 여동생과 평화롭게 지내던 남매에게도 그늘은 있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가져다준 사건이었던 어머니의 이른 죽음(자살로 돌아가신 어머니 문제로 훗날
아버지와 크게 다투기도 하였다)으로 인한 아버지의 재혼 문제 말고는 달리 부족할 것 없는 집안 출신이었던 그.
두뇌 총명한 그는 미국에서도 가장 좋은 사립고등학교를 나와 예일대에 입학하여 지리학을 전공하던 그때,
학과 공부 짬짬이 정신수양을 위한 요가수행에 심취하게 되며 선센터에서 참선을 배운다.
무량스님, 그는 아주 잘 생긴 미남으로 흡사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다고 한다.
특히 그의 크고 푸른 눈은 정말 '예술'이라고 같은 남자 입장임에도 현각 스님은 그리 표현하였다.
그 푸르고 맑고 깊은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깊은 바닷속을 유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란다.
절을 찾은 사람들이 그의 맑은 눈을 보고는 '수행을 하면 저런 눈을 가질 수 있는 것이냐'며 감탄할 만큼
스님의 맑은 눈은 그 어떤 백천마디 법문의 가르침보다 더 확실하게 청정심을 일깨웠다고 현각스님은 말한다.
그는 외모와 달리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스승이신 쑹산 큰스님 다음으로 강인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망치질 한번 안 하고 곱게 자란 그가 낡은 절의 잡다한 수리공에서부터 새절을 짓는데 건축분야 일까지 독학으로 다 마스터했다.
하여
사막지대 해발 4천 피트의 시에라네바다 산자락에다 십여 년 넘어 걸리는 한국전통사찰 세우기란 대역사를 감히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숭산 스님은 공부할 때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오직 모를 뿐’, 일을 할 때는 ‘오직 할 뿐’이라는 생각만 가지라고 하셨지요.
10년째 절을 짓고 있습니다만 언제 완성될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저 ‘오직 할 뿐’입니다,
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무량스님, 초반에 한국인 이 목수한테 사기도 된통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한다.
내가 그분에게 감동받은 부분은 절을 짓는 내내 매일 아침저녁 예불과 참선을 거르지 않았다는 오롯한 일념.
낮에는 해가 떨어질 때까지 땀범벅 먼지투성이가 되어서 수도정진하듯 묵묵히 일만 할 뿐이었다고.
종교는 서로 상통하는 것, 베네딕토 수도원의 모토가 일하며 기도하고 기도하며 일하라 바로 그 점이듯이.
수행의 본질은, 수행자의 길은 비슷하거늘 물질만능으로 치닫으며 군림하는 일부 한국 교단들의 가증스러운 작태라니.
또 하나는 시물(신도들이 보시를 한 재화)을 귀히 다뤄 동전 하나라도 절대 허투루 방만하게 쓰지 않은 그였다.
한번도 새 승복을 입어본 적 없이 낡아 겹겹이 기운 승복을 입고 검소히 지내면서 바랑 하나가 전재산이었던 그.
철두철미 무소유의 삶을 몸소 행으로 보여준 청빈한 분이라는 것에 깊이 경도됐다.
하나 더 들자면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수행처를 만들겠다는 원력대로 기나긴 공사 기간 중에도 친환경 공법을 빌려 쓰며 물자 재활용 실천을 어김없이 일상화하였다는 점이다.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하여 절에서 쓸 모든 동력을 얻으며 사막에서의 소중한 물을 아끼고자 아예 정원도 선인장 정원으로 바꾸고 일회용품 사용은 원천금지다.
법회가 열리는 날도 플라스틱 생수통마저 반입을 자제해 달라는 주문을 해온 태고사였다는 사실이 나를 숙연케 했다.
일면식도 없는, 얼핏이라도 만난 적 없는 무량스님이 친근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아마도 개인적으로 한때 불자였던 내 오래 전의 불명이 무량화여서인지도 모르겠다.
법명 무량은 '헤아릴 수 없음' '끝없음'이듯 월하 큰스님께서 주신 불명 무량화는 '끝없이 빛나라'란 뜻.
테하차피는 기가 강한 곳으로 대웅전에서 절하며 엎드리면 실제 이마에 찌릿한 느낌을 다수가 받곤 한다는데.
거기에 자리를 잡기 전, 4년 여에 걸쳐 명당임직한 미국 여러 곳의 현지답사를 직접 다녔다는 그다.
우주의 맑은 기운과 하나 되어 수행해 나가려면 풍수지리에 따른 명당을 만나야 하기에 미 전역의 웬만큼 에너지 충만한 곳이라면 두루 찾아 누볐는데 마침내 스승의 조언에 따라 마음에 드는 땅을 골랐다.
풍수란 미신이 아니라 땅과 하늘과 물과 바람과 에너지가 서로 조응하는 최상의 조화처를 이른다.
스승도 흡족해 한 자리, 세도나 못잖게 우주의 기가 충만한 곳을 만나니 그곳이 곧 테하차피였다고.
얼렁뚱땅 올라가는 미국식 조립주택도 아니고 순 한국식으로 짓는 목재건축이니 자재는 물론 인건비 등 부대비용이 굉장했을 사찰 건립 비 부담은?
그
전액은
한동안 의절하다시피 한 아버지한테 유산을 미리 달라고 사정사정 떼를 쓰고 졸라대 받은 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6.25 참전용사이기도 해 2003년 한국전 휴전 5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을 받았다.
흐뭇한 기분으로 아들과 함께 발전된 모습의 한국을 돌아보기도 하고 각처의 사찰을 순례하는 동안 미국에서의 보장된 미래를 버린 아들이 힘들게 걷고 있는 수행자의 길을 좀 더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었다.
그 이전 무량스님이 스승의 절을 맡아 한동안 LA 달마사에서 머물 당시.
자동차 번호판에조차 'Y ALIVE' Why Alive라는 글귀를 새기고 다녔다는데 이는 Why do you live? For what?이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란 화두를 끊임없이 참구하며 심저 깊숙이 품고 지냈다는 그다.
연세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여 한국말이 유창해 우수개소리도 곧잘 하며 좌중을 웃기는 등 유모어를 즐기는 무량.
그는
88 올림픽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기자들을 도와 숭산 큰스님 다큐를 찍었다.
그때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불교의 면면을 미국에 전하는 포교의 선봉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태고사 또한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짓고 있지만,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 비바람에 닳고 닳은 터만 남게 될지 모른다. ‘누군가가 여기에 아주 튼튼한 건물을 세우려고 했군.’
그때 이곳을 지나가는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며 무너진 돌덩이를 보다가 무심히 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게 아마 몇 생애 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 나일지도 모를 일이다. -왜 사는가, 본문 중에서-
무량스님은 피땀으로 완성을 본 태고사를 떠나 어딘가 멀리로 표표히 떠나 은거 중이라 한다.
지금 태고사는 그의 뜻대로 한국의 수덕사 및 화계사와 연계된 관리사찰로 지정되어 있단다.
구름처럼 물처럼 떠도는, 그래서 어디에도 걸림 없이 집착 없이 머뭄없이 운수행각을 하는 스님이 한자리에 붙박여 지낼 리야.
단지, 그분 뒤를 이어 태고사에 인연 닿은 한국스님이야말로 정신줄 바짝 조여 책임감과 사명감 가지고 태고사를 부흥 융성시키도록 뜨겁게 용맹정진하시길.......
“한국불교는 종합적 통합적인 불교”라며 “그 매력을 미국 지식인들에게 전하고 싶다”했던 무량스님.
한국 불교를 미국 나아가 전 세계에 알리고, 불교를 넘어 더불어 환경을 생각하는 공동체를 가꾸는 꿈.
나아가 온 누리에 자비와 평화를 가져오는 초석이 될만한 영향력 있는 청정도량 태고사가 되기를 바란 무량스님의 원력대로 부디 한국의 진정한 수행승, 깨어있는 눈 푸른 납자가 있어
테하차피에서 그의 숭고한 뜻을 온전히 계승 발전시켜 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2012
https://brunch.co.kr/@muryanghwa/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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