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날씨가 꾸무레했다.
오후 들어 하늘이 깨어나기에 자구리해변으로 내려갔다.
친구에게 소라의 성과 허니문 하우스를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스모그가 걷히지 않은 바다 빛 칙칙했다.
<섶섬이 있는 풍경> 그림 속 하늘과 물빛처럼 우중충한 오후.
자구리 바닷가에서는, 피난 시절 중섭 아재 가족이 게 잡으며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는 사연 풀어나갔다.
한국동란으로 고향 원산을 떠나 서귀포까지 흘러온 중섭 일가는 궁핍한 피난살이마저 따뜻했다는데.
행복은 화려하고 부유하고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두 아들, 단칸 셋방에서 살 비비며 오순도순 지낸 그때가 화가의 생애 중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담뱃갑 은박지와 엽서 한 귀퉁이에 그림을 그릴망정 그래도 재회의 희망 속에 살았던 그 남자.
일본으로 떠나보낸 가족을 그리워하다가 젊은 나이에 홀로 저 세상으로 간 화가 이중섭은 마사코를 향해 애절한 편지를 쓴다.
나의 빛, 나의 별, 나만의 천사라 부르던 마사코와 두 아들만을 남겨두고 그는 어찌 눈을 감았을까.
평생 서귀포를 노래한 한기팔 시인의 <서귀포에 와서는>을 잠시 멈춰 서서 읊조려도 보았다.
공원에 조성돼 있는 조각품과 시비 일별한 뒤 용천수가 솟는 담수풀장까지 내려가질 않고 서복전시관 쪽으로 설렁설렁 걸어갔다.
4.3 유적지 팻말이 기다렸다.
그러나 소낭머리 절벽에 핏빛 과거사를 새겨놓은 데라서 역사에 관심 깊지 않으면 굳이 들릴 일 없어 패스.
서복전시관 역시 서귀포 관광지 중 가장 맘에 들지 않는 장소인 만치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정원 멋스러운 왈종미술관도 문이 닫힌 시간이라 외관만 훑은 뒤 곧장 정방폭포로 내려갔다.
몇 차례 서귀포 여행을 한 바 있는 친구인데 올 적마다 폭포수 시원찮았다고.
이번에야말로 장신의 폭포 위용을 제대로 감상했다며 그녀는 흐뭇해했다.
정방폭포 앞에서 섶섬과 문섬을 비롯, 폭포 내리는 절벽의 주상절리대를 우리는 오래 지켜봤다.
공식처럼 늘, 두 줄기 물길 줄기차게 쏟아져내리는 새하얀 나신의 정방폭포.
물줄기 형태 한결같지 않은 것은, 바람의 영향인지 수량이 달라서인지 모르겠으나 수시로 변형이 되곤 했다.
다음 차례는 소라의 성과 소정방폭포다.
소라의 성 시민 북 카페도 이미 클로즈.
직선과 곡선 아우르는 한국 1세대 건축가인 김중업 선생, 현대 건축의 거장인 그분 작품으로 추정될 뿐 정체는 물론 소속 불명의 이 건물은 1969년에 지어졌다고.
건축대장조차 없다는 시크릿 하우스이니 추측건대 당대 최고 권력자의 별장이 아니었을까.
벙커 형식의 건물도 그러하지만 바로 인근에 이 대통령 별장터인 화락원도 있다시피 여기는 서귀포 최고의 전망터.
초창기 한국 건축사에 큰 획을 그은 유명 건축가 얘기 곁들이며 외관 수려한 건물 측면에서 사진 한 장씩 남기고 소정방으로 향했다.
경사진 층계를 보자마자 친구가 고개를 가로젓는지라 소정방폭포 아래까지는 내려가지 않았다.
마무리로 파라다이스 호텔 내 허니문하우스 카페로 향했다.
파라다이스 그룹 호텔은 8.90년대 최고급 신혼여행지였다고 알려진 곳.
사일구 혁명 후 국가 귀속지가 된 채 오래 방치시킨 이 장소를 인수해 호텔을 지었다 한다.
이 멋지고 아름다운 건물이 권좌에서 쫓겨난 초대 대통령 별장이었노라 헛소문 퍼졌지만 이는 낭설일 뿐.
그도 그럴 것이 한국전쟁으로 피폐했던 50년대에 이따위 사치스러운 별장을 지을 얼빠진 작자가 있을 리 만무다.
회랑으로 연결된 호화판 연회장과 대형 수영장이 딸린 지중해풍 건물을 보나 따나 오십 년대 집이라는 건 터무니없는 난센스다.
바로 위 사진, 대숲에 가리어진 창고같이 초라한 건물이 바로 이 박사 별장 화락원이다.
파라다이스 호텔은 객실수가 적은 관계로 운영상 어려움을 겪다가 현재는 이웃한 칼호텔이 인수해 카페로 허니문 하우스만 개장했다고.
이국풍의 호텔 메인 건물은 아직 사용치 않아 폐가처럼 을씨년스러우나 드라마 촬영지로 또는 웨딩촬영 장소로 인기 있다 한다.
그만큼 대충 찍어도 어디나 화보각 근사하게 나오는 곳이다.
여섯 시 반이면 문을 닫는 카페라 주변 아름다운 경관만 구석구석 훑어보고 노을 진 동홍동 가로를 질러서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