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신한 대기가 부추기기도 했지만 그냥 집에 앉아있기 미안쩍은 날씨였다.
신록에 대한 예우로라도 산자락 어디든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았다.
연둣빛 고운 숲속길 걸어가며 꾀꼬리 소리 귀에 담아보고 싶었다.
애당초 목적지 삼은 곳은 금샘, 벌써부터 벼르던 금샘을 찾아보려고 금정산엘 갔다.
교통 편한 온천장이 거주지이므로 금정산 바로 아랫동네이나 범어사 쪽에서 산을 오를 계획.
노포행 지하철을 타고 범어사 역에서 하차했다.
지하철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고 범어사에 올라가는 대신 항상 계곡길 따라 걸어서 간다.
시작 지점부터 데크가 놓여 걷기 편한 데다 한두 곳 가파른 장소도 그늘진 숲길이라 걸을만하다.
쭉쭉 뻗은 편백나무 기상 청푸르며 힘찬 계류 소리 청량해 이 누리길은 곧잘 명상길이 되어준다.
30분쯤 걸어 올라가면 범어사 입구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길을 잡아 계속 오르면 청련암 내원암 스치게 된다.
지난번 등꽃이 폈나 하고 내원암에 갔다가 고당봉 가는 길목을 봐둔 적이 있기에 성큼성큼 확신에 찬 발걸음이다.
들고 온 스틱 사용할 필요 없을 정도로 등산로는 완만한 흙길이라 걷기 아주 만만하다.
눈엽 싱그런 활엽수림이 따르는 길에서 잠깐 돌아서보면 맞은편으로 계명봉이 시야에 올연한 자태 드러내기 시작한다.
고도가 좀 높아졌다는 신호다.
길 안내판을 눈여겨보며 쉬엄쉬엄 전진, 아직은 땀도 나지 않는다.
올라갈수록 만발한 진달래가 반겨준다.
화왕산 영취산이 아니라도 뜻밖에 천지인 진달래꽃.
태백산이나 덕유산 겨울 산행을 해야 만나던 상고대며 설화나 마찬가지, 금정산 고지에 오를수록 진달래꽃 선물이 푸짐하다.
어느새 눈앞에 우뚝한 고당봉 마주하니 바위로 된 봉우리 전체에 화염 번지듯 진달래꽃 점점이 환하다.
암벽 어디다 뿌리내리고 무더기 무더기 연분홍 진달래꽃 피워 올렸을까 신기하다.
언제나 실제 그대로의 반에 반도 옳게 반영하지 못하는 시원찮은 사진이라 그렇지 직접 올려다보면 와우~탄성감이다.
높은 산은 가쁜 숨 몰아쉬며 힘들게 정상에 오른 산행인들에게 사방 탁 트인 시원한 전망만으로 감격을 주는 게 아니다.
매 절기마다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축제 마련해 두고 두 팔 벌려 환대해 주지만 결코 젠체하지 않는 자연.
오늘 목적지는 금샘, 고당봉을 지나쳐 0.3 km 더 가면 금샘이다.
아주 오래전에 금샘을 가본 적 있기에 다시 한번 그 바위에 올라가 부산 전체를 조망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막상 금샘에 닿고 보니 전혀 낯설다.
이처럼 어마무지하게 큰 바위 무더기가 아니었는데 로프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아주 험한 바위, 주춤해진다.
새파랗게 올려다 보이는 창천이 깊이 모를 심연처럼 소용돌이치며 단숨에 빨아들일듯하다.
더구나 길목에 버티고 선 경고판이 겁을 잔뜩 준다.
아서라, 암벽등반 도전에는 엄연히 나이 한계치에 따른 제한이 있다.
괜스레 만용 부리다 아차 하는 순간, 이 나이에 골절상 입으면 생고생하는 데다 두루 민폐 끼친다.
그래서 아들은 스틱을 사다 주면서도 금정산 가까이로 이주해 자주 산행하겠다는 걸 은근 염려하는 눈치였다.
두루 신경 쓰일 짓은 피차 안 하는 게 좋다, 로 결론짓고는 금샘에 미련 두지 않고 즉각 뒤돌아섰다.
집에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고 알았지만, 전에 가봤던 곳은 제2 금샘으로 높이가 만만한 편이고 진짜 금샘은 콧대 드높았다.
다시 고당봉으로 되짚어 돌아오게 돼, 예정에 없던 고당봉을 이번엔 올라가 보기로 한다.
전에는 로프 의지해야만 오를 수 있던 암봉이라 바라만 봤는데 지금은 아이들도 다람쥐처럼 오를 수 있는 고당봉.
까마득 허공으로 치솟은 층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 정도이다.
거칠 것 없이 불어 젖히는 오후녘 산바람이 전신을 흔들어댄다.
고소 공포증으로 다리가 후들거려 튼튼한 난간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부여잡고 한 발짝씩 조심스레 옮겨놓는다.
배낭은 아래에 벗어두고 폰은 주머니에 넣었길 잘했다.
겨우 끝까지 올랐으나 줄 서서 차례 기다리는 사람도 많은 데다, 정상 표지석 부여안고 인증샷 찍을 엄두는 도저히 안 난다.
높이 801.5m로 부산의 진산 금정산의 주봉이자 최고봉인 고당봉에 서면 남해 수평선 너머 대마도가 아슴히 짚인다.
광안대교며 마린시티도 저 아래 엎드렸고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기장 쪽 동해도 내려다보인다.
낙동강 줄기 너르게 펼쳐진 건너로 김해가 드러나고 오륜대 저수지와 경부고속도로가 굽어 보이는가 하면 양산도 한눈에 든다.
금정산성이 실금처럼 가느다랗고 오목한 분지에 산성마을이 모여있다.
동서남북으로 방향만 바꿔가며 사진 찍고는 아쉬움 두지 않고 내려왔다,
역시 더듬거리는 게(蟹) 걸음으로.
하산길은 한층 수월했으나 무릎 관절 고려해 이때만은 스틱을 사용했다.
가뿐하게 산을 내려와 범어사 한 바퀴 돌고는 계곡 쪽으로 걸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