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잡동사니가 든 상자를 정리하다 겉장에 2000년이란 금박 숫자가 박힌 수첩을 집어 들었다. 한국에서 사용하다 이민 가방에 실려 온 몇 안 되는 물품 중 하나다. 십 년 이상이나 지났으니 꽤 해묵은 다이어리 수첩이다. 간간 기록된 몇 줄의 휘갈겨 쓴 메모와는 달리 식구들 생일, 집안 기일만은 정성스레 적혀있다. 뒤쪽 주소란에는 빼꼭하게 들어차 있는 전화번호들. 순서는 아무래도 자주 찾게 되는 가깝고도 중요한 사람들의 연락처부터다.
가족들, 친인척들, 친구들, 회원들, 동인들, 그밖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수첩에 오른 이름들은 꼭 기록해두어야 할 만큼 그 당시엔 특별한 사람들일 터이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가물거리는 기억으로 이제 얼굴마저 아슴하니 헷갈리는 사람도 그중엔 있다. 누구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 생각 끝에야 겨우 얼굴과 이름이 연결될 즈음에 이르면 무심한 세월만 나무랄 수도 없다. 이처럼 슬며시 잊혀지고 사라진 인연이 얼마인가에 생각이 미치자 좀 씁쓸해진다.
허둥거리며 살아온 날들이었다. 둘레를 살피지도 못하고 인연을 챙기지도 못한 채 급류를 탄 물살처럼 정신없이 떠밀리며 내달리기만 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 세월, 하긴 퍽 긴 세월이다. 그러나 한때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며 따스한 마음을 나눴던 사람들 이건만 안개 사이로 바라보듯 희미해진 얼굴들. 이리도 가뭇없이 소멸돼버린 이름일 수가 있다니.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을 시 분명한 일이 아닌가.
살가운 피붙이와 허물없는 친구들과 작별하고 미국에 닿자마자 곧 체리힐이라는 동네의 한인들이 모인 한 공동체에 합류했다. 다들 좋은 이웃이었다. 낯선 미국 생활에 적응해 가는 이민 초보자를 위해 한결같이들 친절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한인들은 이처럼 거의가 믿음 공동체를 구심점 삼아 옹기종기 모인다. 한기 스민 타관살이 동병상련에다 같은 신앙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만난 사람들. 서로 이심전심 통하는 이들끼리의 교류인 만치 여러모로 안전한 자리다. 거기서 미국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음은 물론 일 주간에 걸친 생활 스트레스를 수다 통해 풀어낸다. 동시에 목마른 한국말에 대한 해갈을 얻기도 한다.
다민족 사회인 미국이다. 하지만 만수산 드렁칡처럼 얼크러 설크러져 살기보다는 독야청청 소나무로 살고자 하는 것이 한인들의 보편적 정서다. 따라서 미국이란 용광로에 한데 얼려 녹아들지 못하고 외따른 섬 되어 지내다가 일요일이나 되어야 비로소 고도를 벗어나 보게 된다. 그러니 교민들에게 신앙생활은 필수요 기본이다. 반면 온갖 시비곡절의 발상지가 되기도 한다.
그 당시 한 울타리 안에 모여 교류를 나누었던 인연 중에는 처음의 푸근함이 그대로 남아 아직도 여전스러운 친구가 있는가 하면 온기 식어버린 채 적조하게 지내는 경우도 꽤 있다. 개인적인 감정의 마찰이나 성격 결함으로 관계가 경직된 것은 아니다. 이는 순전히 견해가 엇갈린 공적 문제(사제 교체)로 인해 반목과 갈등을 겪다가 끝내 냉랭한 사이가 되어 거리가 멀어지고 만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근 80%에 이르는 교우들이 힘께) 미국성당 식구되어 떠나게 됐다. 다시금 관계 복원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어버렸다.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적절한 기회를 잃었으니 이제는 서로를 인정하며 각각의 길을 조용히 걸어가는 것이 최선책이다.
무심히 흘러가는 것들, 강물이 그러하고 세월이 그러하다. 저마다의 인생 역시 강물 되어 세월 따라 흘러가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흘러가는 강물이 잠시 닿았던 적이 있는 강기슭일 뿐이었다. 흘러가는 시간의 바람이 잠시 스쳐 지난 나뭇가지에 불과했다. 나는 여기 항상 머물러 있었을 따름이었고 강물이, 시간이 나를 스쳐 흘러가는 그 사이로 숱한 인연들과 만나고 헤어졌던 셈이다. 때로는 소홀하게, 하찮게, 허투루, 그렇게 멀어지고 잊혀진 얼굴들.
잠깐 스쳐 지난, 혹은 오래 머물다 떠난 뭇 인연들에 연연해하지는 않겠다. 흘러가는 것들은 그냥 흘러가게 하고 떠날 것들은 떠나가게 해야 한다. 참 쓸쓸한 일이지만 아무도 잡을 수 없는 시간이요 거스를 수 없는 강물이다. 누군가와의 행복했던 만남, 아쉬웠던 사연, 서운했던 기억, 불편했던 인연도 있다. 그 모두를 시절 인연이 다했다고, 영원한 것은 없다고, 과거는 흘러갔다고 툭툭 털어버리지 못함은 미련만은 아니리라. 이는 모든 만남 하나하나가 돌이켜 소중했던 까닭이다. 그때 그 자리에서 만나지도록 섭리된 우리였기에, 아니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숙세의 인연이라 하였으니... 묵은 수첩 하나가 여러 상념에 잠기게 한다.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