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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08. 2024

칠십 대 중반 지나서야 접한 보석

[천국의 열쇠]를 이제야 읽었다


얼마만인가, 이런 열정은...

요 며칠 불같은 열애에 빠져버렸다. 밤샘도 마다하지 않고 끼니도 잊을 만큼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다. 삶의 기준으로 삼아 닮아보고 싶은, 진짜 멋진 작은 거인을 이제야 만나다니.... 그는 하느님이 공들여 닦아 걸어놓으신 빛나는 별이자 맑은 거울이었다.



어째서 몰랐을까? 그를 칠십도 한참 넘어서야 만나게 된 것이 자못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우리의 만남이 좀 늦었지만 그래도 얼마나 감사할 일이고 다행인가. 진한 감동 속에 그에게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들. 올해 전체가 그로 인해 의미롭고 특별할 수 있을 터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카톡을 여러 곳에 보냈다. 아들에게, 친구에게, 조카에게, 대녀에게도. 올봄 짬을 내어 이 책만은 부디 읽기를 권하노라고... 꽤 두툼한 책이지만 시간 투자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무엇보다도, 삼 년 동안 세상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던 코비드 19의 확산으로 전전긍긍한 바 있는 대한민국 시민 모두가 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예나이제나 두렵고 공포스러운 일이나 일선에서 헌신하는 의료진과 봉사자는 지금도 존재한다.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는 지난주에 딸이 사 갖고 온 책이다. 낮에 따로 하는 일이 있으므로 오후에나 틈틈이 읽으려 했는데 한번 펼치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속독하는 편이지만 이번에도 [앵무새 죽이기]에 밑줄 그으며 읽었듯 수없이 밑줄을 긋느라 속도는 더뎌졌다. 밑줄도 모자라 모퉁이를 접어 표시해 둔 곳이 여러 장이다 보니 그러느라 시간은 더 소요됐고 새책이 헌책 됐다.



전직 의사였던 작가이건만 의외로 첫 페이지에서부터 섬세한 필체의 묘사로 첫눈에 나를 확 사로잡아버렸다. '크림전쟁 때에 노획한 성벽 위의 대포는 게를 쪼아 먹으러 오는 갈매기가 잠시 쉬어가는 나뭇가지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주인공이 유년시절을 보냈고 35년간 중국 선교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고향 풍경을 이렇게 보여주며 소설은 시작된다.



 '노동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보다 더한 기쁨이란 세상에 다시없을 것 같다. 머리보다는 손으로, 마음을 다 쏟아 일할 때 느껴지는 기쁨. 대지의 상쾌한 숨결을 호흡하며 소박하게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바로 천국의 생활이라 여겨졌다.' 어린애 같은 단순함과 솔직성과 진지함이 묘하게 혼합되어 있는 치셤신부는 전쟁과 약탈로 망가진 중국벽촌 선교회를 손수 재건해 나간다. 그는 모진 전염병과 홍수를 딛고 일어나 어렵사리 얻은 평화 가운데 하루 일을 시작하면서 잔잔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의 악의와 위선 그리고 끝없는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와 실망의 거센 물결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함께 지내는 수녀 사이에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출신 수녀와 적대국이 된 프랑스출신 수녀 및 벨지움출신 수녀 간에 계속되는 엄청난 증오와 대립을 접하게 된 신부는 번민에 빠진다. 여성 내면에서 회오리치는 복잡 미묘한 심리표현에도 아주 능란하여 거의 절묘하게 그려낸다. '편지를 쓰는 일은 화산처럼 격렬한 그녀의 감정을 분출해 내는 유일한 분출구였다. 또한 편치 않은 양심의 속죄와 위안을 받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귀족 출신인 원장수녀가 한없이 겸손하기만 한 신부와 반목하면서 써 내린 편지였다.



함께 전염병에 맞서 분투하던 죽마고우가 페스트로 황폐해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지옥이 이보다 더 참혹할까?" 하자 "지옥이란 인간이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거라네." 이처럼 그는 조용하나 확고하고 분명한 신념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고난을 약속하셨다. 이 세상은 아름다운 내세의 준비로서 주어진 것뿐이다.'라고 엄숙하고 건조한 신앙소설의 면모도 때로는 보인다. 그럼에도 종파 불문하고 거부감 없이 읽히게 되는 천국의 열쇠. '나는 내 일생의 평판을 하느님께 맡기겠소'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는 사람. '부디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 의도를 보아 제 생애를 심판하소서.' 그런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치셤 외에 그리 흔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The Keys Of The Kingdom' 원 책제목에 천국의 열쇠는 단수가 아닌 복수로 표현되었다. 결국 누가 '천국의 열쇠'를 쥘 수 있는지? 그 열쇠는 천주교, 기독교, 불교, 기타 종파를 절대로 따지지 않는다. 심지어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에게도 그 길이 열려 있다고 약속한다. 그는 말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러 곳이며 우리가 이쪽 문을 택해 천국에 들어가듯 또 다른 사람은 저쪽 문을 택했다는 차이뿐, 자기 믿음의 길을 따라 각자 천국에 이르는 것이라고. 내 신앙 내 종교만이 진리이고 구원이 있고 최고라는 아집과 독선 대신, 누구라도 진정 어린 마음으로 선덕을 실천하며 산다면 하느님 나라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께 존경심과 호감을 갖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는 말씀을 듣고부터다. 남을 개종시키려 말고 타인의 믿음을 존중하라며 다른 종교도 인정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말씀에도 고개 주억였다. 그런데 100년 전이 무대인 이 책의 주인공은 그 시절에 이미 같은 맥락의 말을 한다. 스스로가 돌아보아 가책이 없는 성실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구원받는다고.. 최후의 심판 때에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사람을 보시더라도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진 않을 거라고.... 그게 하느님의 넓으신 사랑이라고.



중국 선교생활을 하는 동안 주인공은 수천 년 동안 뿌리 박힌 유교나 도가, 노장자의 철학 등도 수용한다. 그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배려하지 않는 배타적 선교의 위험성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그는, 같은 지역에 새로 선 교회인 프로테스탄트 목사 부부와 우정을 나누며  갈등 대신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시켜 나간다. 페스트 창궐지역에 친구를 돕고자 자원해 온 무신론자 의사 윌리 탈록이 사경을 헤맬 때였다. 형식과 교리에 얽매여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주문 대신 주님도 그를 용서하실 것이라며 친구 눈을 감겨주던 치셤신부. 그의 지극히 인간적인 태도를 보며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은 감화를 받는다.   



중국에서 그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좌절도 겪고 질병, 전쟁등을 만나지만 그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되일어서곤 했다. 또한 한결같이 신실한 사랑과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봉헌하는 성자적 실천의지에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외면했던 중국인들이 자진해서 개종하려 했으니, 지역 토박이 거부인 챠씨를 비롯해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맞다, 신앙은 입(말)이 아니라 몸으로 표현되고 행동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 명의 '삶의 스승'이 천 명의 '글의 스승'보다 더 필요하다"는 말대로다. 매우 자존심 강하고 오만했던 베로니카 원장 수녀조차도 신앙인으로서의 너무도 희생적인 그의 모습에 감화되어 마침내 신부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쏟게 된다. 겨우내 독야청청하던 소나무 가지가 찌이직~꺾이는 것은 강풍 때문이 아니라, 부드러이 내려 쌓인 눈무게로 인해서이다.



[천국의 열쇠]에는 주인공 '프랜치스 치셤' 신부와 '안셀모 밀리' 신부가 등장한다. 유년기를 함께 지낸 그들은 같은 성직자로서 헌신하는 동료였지만 둘의 삶은 판이하게 달랐다. 프랜치스 치셤은 청빈과 인내의 강직한 삶을 용기롭게 살았다. 화려해 보이는 출세와는 거리가 멀고 외형적으로도 왜소하니 볼품없는 데다 질곡과 풍우에 시달리는 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반면 안셀모 밀리는 외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고 높은 영예를 누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준을 아는 사람은 가난한 자 곁에 서서 늘 검박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프랜치스가 최종승자임을 안다.



이 두 종류의 대비되는 인생에서 늘 존경받는 쪽은 안셀모이고 사람들은 치셤의 진정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종국에 '천국의 열쇠'는 안셀모 밀리 같은 출세지상주의자의 몫이 아닐 터. 치셤 신부와 탈록 의사처럼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자의 것임을 설파하며 참 신앙인의 길 뿐 아니라 올바른 삶의 방향을 이 소설은 제시해 준다. 두 사람의 삶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가 과연 더 바람직하고 가치있는 생을 살았는지는 쉽게 구분된다.



항시 기름진 얼굴에 풍모 그럴듯한 안셀모보다는 초라하니 주름 투성이의 프랜치스가 천국의 열쇠 주인임은 당연지사다. 특히 성직자의 경우, 사목적 권한을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였는지에 따라 마지막 순간 주님으로부터 '행복한 종' 또는 '불충한 종'으로 판정받게 마련이다. 이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오늘 이 시대 역시  안셀모는 여전히 많지 않을까.



프랜치스는 중국선교사로서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비참한 영혼들을 연민으로 보듬어주었다. 그들과 같은 위치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기꺼이 감당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은 그의 생은 의미 있고 아름다운 삶일 수 있었던 거다. 종교 간 인종간 반목과 사회 간 갈등, 그리고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격차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참인간상과 참신앙인의 모습을 분명히 짚어준 소설인 천국의 열쇠. 인간을 진실된 사랑으로 감싸 안지 못하는 종교는 어떤 형식의 종교이든 도그마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믿음은 자칫 맹신이 되기 쉽다는 것을 또한 이 소설은 말해준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국가나 민족이 다르고 종교와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대립, 반목, 갈등, 증오하는 대신 온 인류가 사랑과 평화 가운데 하나로 일치되는 화합의 길을 추구하길 바라며 글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여러분 각자가 합창단이 되십시오. 화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일치하여 하느님의 곡조를 한 목소리로 노래하십시오. 말로 주님, 주님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있지 않기보다는 말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는 순교를 목전에 둔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한 나라 같은

동포끼리조차 흑백, 좌우, 보수 진보로 갈라져 날마다 이전투구를 벌이는 작태란 얼마나 한심스러운가. 과연 무엇이 소중하고 진정 가치 있으며 하느님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길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은 나날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해보게 하는 책. 내가 그러했듯 책 속의 여러 군상 중에서 틀림없이 자기 자신의 감춰둔 모습과도 마주치게 될 텐데 부디 부끄럽지 않기를...... 대한민국 시민들이여, 부디 혼몽에서 깨어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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