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은 드라마 작가다.
그것도 최고로 잘 나가는 인기 작가다.
감각적인 대사와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인물 설정으로 열혈 마니아층을 거느린 역량 있는 작가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평상시 주변에서 접할 법한 피부에 와닿는 대사로 많은 고정팬을 확보한 독보적인 존재다.
언어의 마술사라는 김수현 작가와 쌍벽을 이루며 완성도 높은 대본을 쓰는 이 시대 최고의 드라마 작가 반열에 오른 젊은이다.
한국 살 적에는 TV 드라마를 거의 안 봤는데 뉴저지에서 세탁소 할 때 마침 같은 몰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또래였던 조슈아 할머니가 재밌다고 보라며 해묵은 드라마 비디오테이프를 한 보따리씩 안겨줬다.
비디오 가게가 사양길에 접어들 무렵이라 교사인 딸네 애들이나 돌보겠다며 일을 접으려 할 때였다.
그렇게 노희경의 <거짓말>이라는 드라마 전작을 날밤 꼬박 새워가며 봤던 기억이 난다.
초입부터 내내 빠른 극전개와 파격적인 인물 설정으로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게 하는 흡인력 대단한 드라마였다.
이번엔 그녀의 책 얘기다.
고사리장마가 든 사월, 중국발 황사로 대기는 늘 우중충했기에 밖으로 나돌 수 없어 허구한 날 두드려댄 컴퓨터놀이도 시들해지며
별로 재미가 없어졌다.
그즈음에 이웃 지인한테서 노희경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소설을 빌렸다.
바로 며칠 전 컴퓨터 유튜브에서 <우리들의 블루스> 드라마를 보며 눈가 꽤나 붉어졌던 터다.
그 눈물 나게 찰진 대화체라니, 역시 노희경 아닌가.
책은 술술 읽혔고 기어이 밤잠 놓친 채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다.
소설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섬세한 심리묘사와 무릎 탁 치게 만드는 명품 대사가 찰지게 끌어당겼다.
아내, 어머니, 며느리, 누나의 이름으로 가족들 위해 헌신해 온 한 여인의 마지막을 그렸으니 줄거리 자체는 진부할 수도 있다.
집안일에 도통 신경 쓰지 않는 무뚝뚝한 의사 남편.
불만과 갈등 속에 방황하는 삐딱한 삼수생 아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백화점 인테리어 담당인 딸,
아들 병원이 사라지는 충격으로 치매가 와 며느리를 쥐 잡듯 하는 시어머니.
누이에 빈대 붙어살며 툭하면 사고 치는 말썽쟁이 친정 동생 그리고 말기 암으로 가족들과 이별을 준비하는 중년 여자.
예상치 않은 빠른 작별로 엄마는 작가의 한이 되고 말았듯 그렇게 부모도 경우에 따라 자식에게 한으로 남을 수 있는 일이다.
아버지 말대로 집에 와선 손 하나 까딱 않고, 그것도 모자라 늘상 바깥일 힘들다고 짜증이나 내던 딸이, 마지막으로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엄마를 포기하는 일이다. 176쪽
"전 엄말 이렇게 보내드릴 수가 없어요. 너무 미안해서, 미안해서--- 안 돼요. 이렇게는 안 돼요. 미안해서, 죄송해서 안 돼요. 나도 딱 한 번만이라도 자식 노릇 하게 해 주세요. 나도 딱 한 번만이라도 엄마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아버지 제발---."219쪽
언제 누구와 이별을 해야 할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우리네 삶이다.
그럼에도 죽을 때나 되어야 사람은 철이 든다던가, 철들려면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한 데다 예상 못 한 쎈 충격파가 필요한가 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걸,
목숨처럼 사랑했다는 걸 그녀는 알았을까.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녀로 인해 울음 운다는 걸
그녀는 알까. 제발 몰라라, 제발 몰라라.
노희경 작가가 머리말을 대신해 엄마에게 쓴 글이 서문처럼 실려 있어서 소설에 더한 감동과 여운을 안겨줬다.
엄마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난 3년 뒤에 나온 작품으로 소설 속에는 엄마를 향한 애틋한 사랑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를테면 소설 형식을 빌려 그녀가 엄마에게 바치는 절절한 사모곡인 셈이다.
아마도 뒤늦게들 후회하지 말고 곁에 있을 때 사랑하라는 말, 모두에게 곡진히 들려주는 대신 이 작품을 쓴 거 같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있을 때 잘해,라는 소리다.
너는... 나야, 엄마는... 연수야.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가 눈물범벅이 된 딸 얼굴을 비비며 하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읽으며 이 대사에서 최루탄에 쏘인 듯 주르르 걷잡을 수없이 눈물샘 터져버렸다.
코로나 정국이라는 전체주의 상황 같은 틀에 갇혀 격한 분노 덩어리 풀지 못한 채 침전돼 있었는데, 울음 한바탕 쏟고 나니
내면 정화되며 한결 머리 가뿐해졌다.
감정이입으로 슬픈 느낌 한껏 분출시키자 그동안의 갑갑한 기분 어느 정도는 해소된 듯, 하게 만든 그녀 참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