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래적으로 후각이 예민한 편이다.
성이 具 씨라 강가지 狗 씨 아니냐는 농을 들을 정도로 냄새에 민감하다.
유난히 향수 사용을 많이 하는 미국인들이라 뉴저지에서 세탁소를 하면서 손님 많은 날은 더러 물건이 섞여도 향으로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인상에 강렬하게 각인되는 게 향기다.
처음 세탁소를 시작했을 때 사람 이름 외우기가 어려워 각 개인의 특성으로 손님을 기억했는데, 이를테면 크루즈 여행 가서 고래 봤다고 자랑한
남자는 고래아저씨, 금발에 헤어스타일이 비슷해서 언뜻 다이애나, 그중엔 '향수통'도 있었다.
유대인 변호사인데 어찌나 옷에 밴 내음이 강하던지 세탁물을 쏟아놓으면 짙은 향이 재채기를 유발하는 바람에 적잖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향수통 아저씨의 딸내미도 변호사였는데 젊은 그들 내외는 세탁물로 미루어 볼 때 오데코롱 정도나 썼으련만 무조건 향수통 Two가 되고 말았다.
서해안 땅끝마을에서부터 변산반도와 고군산군도를 거치는 이번 여행기간 동안, 해변가에 즐비한 해당화꽃을 맘껏 즐겼다.
사진에 담기도 하고 멀리 혹은 바짝 다가가 해당화 향을 여러 각도로 음미하면서. 만일 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조향사나 와인 감별사가 됐어도 괜찮았을 후각이라 오죽하면 공항에서 마약견을 볼 적마다 시선 은근하기까지 했을까. ㅎ
스물셋, 사주단자라고도 하는 봉채함이 왔다.
대구에서 사업을 크게 하신 시어른이라 봉채함에는 그 당시 시골에서 보기 어려운 예물 채단이 그득했다.
귀금속 못지않게 시선을 끈 것은 연분홍 가방에 든, 화장품 중 각진 유리병 안의 노란색 액체 샤넬 No.5였다.
그때 처음으로 프랑스제 향수를 접해봤다.
하긴 프랑스제이고 국산이고 향수란 걸 당시 처음 접했다.
십 년 넘어까지 아주 오래 썼던 친근한 향수로, 요즘 전시된 상품을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병 디자인도 그대로다.
그 후 직접 사서 쓴 적은 없으나 감각에 새겨진 걸까, 그 향의 여운은 상기도 연연히 남아있다.
꽃 중에서 해당화나 치자꽃이나 찔레꽃이며 인동초꽃 향기가 좋아 꽃까지 선호하는 나.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샤넬 No.5가 해당화 향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을 듣고 나서 이참저참 더욱 각별하게 여겨졌다.
올해로 어언 결혼 54주년이 된다.
한국에 와서 보니 아들이 서류함으로 쓰는 분홍가방이 바로 그 향수가 담겨있던 화장품통으로 나와 닿은 인연만도 오십수년 세월.
잠금장치가 특이해 우리도 화장품통 대신 내동 금고 역할을 도맡아, 패물이며 등기서류나 기타 주요품을 넣어두었더랬는데 아들 역시 같은 용도로 현재 사용하고 있었다.
분홍가방 비록 낡고 빛은 바랬으나 그 위로 겹쳐지는 풋풋했던 젊은 시절이 샤넬 No.5와 함께 떠올랐는데, 서해안을 돌면서 만발한 해당화를
만나자 아련해진 향수 내음 거푸 꽃내음에 겹쳐지곤 했다.
해당화는 꽃말조차 '이끄시는 대로'라니 그 얼마나 성결스러운가.
상큼하면서 로맨틱하고 화려한가 하면 청신한 해당화향에 취했던 서해안 여정은 꽃이 함께 한 여로로 기억될 게다.
연간 1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세기의 명품 ‘샤넬 No.5’ 향수를 만든 가브리엘 샤넬.
그녀는 러시아 황제의 사촌인 공작과 러시아 황실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와 몬테 카를로를 여행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녀는 럭셔리한 여성용 향수 프로젝트를 구상하였다.
그들은 필리핀이 원산지인 일랑일랑, 프랑스 중부 지방에서 자란 장미 꽃잎, 재스민 등 수십 가지 최상의 꽃향을 모아들였다.
여기에 화학물질인 알데히드를 인공 합성하여 새로운 향을 만들어냈다.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가 번호가 적힌 열 개의 샘플을 내놓았을 때 샤넬은 그중 5번을 선택했다.
샤넬이 5라는 숫자에 집착한 이유는 그 숫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믿음 때문으로 그게 상품명으로 낙점되었다.
새 상품 출시일이 1924년 5월 5일이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코코 샤넬 그녀가 내셔널리즘 광풍이 불고 있는 한국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은 다행이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라며 바느질을 배워 그 길로 나갔다.
버나드 쇼는 당대 가장 중요하고도 영향력 있는 두 명의 여성으로 꼽은 인물이 퀴리 부인과 가브리엘 샤넬이었다.
앙드레 말로는 이번 세기에 프랑스에서는 드골, 피카소, 샤넬, 세명의 이름만 남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우아한 미모까지 겸비한 그녀는 당시 프랑스 사교계에 널리 회자될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디자이너이자 향수와 주얼리로 패션업계를 석권하다시피 하며 성공적인 삶을 이어가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프랑스인들이 독일군에 대항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일 때 샤넬은 나치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딩클라게와 사랑에 빠졌다.
얼마 후 연합군이 승리하며 프랑스가 해방되자 샤넬은 반역자 신세로 추락, 연인과 스위스로 망명했다가 15년 만에 귀국했다.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나치 부역 혐의로 인해 조국에선 별 각광을 받지 못했으나 미국에서는 열광적인 인기를 몰고 다녔다.
인생항로에 늘 순풍만 부는 것도 아니며 파고 드높은 것만도 아니라는 걸 이쯤 살아보니 알겠다.
누구를 막론하고 생은 행복과 불행의 이중주곡, 희비쌍곡선이 탄주 되는 것.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들을 나름대로 충만하게 채우는 것이 행복감 지혜로이 만드는 일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