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 기암 휘감는 안개와 진달래

by 무량화


영실, 가히 신령스러운 기운이 머물만한 장소다.

영실 입구에 들어서면 좌우로 밀밀한 적송 군락지 한참 이어진다.

얕은 계곡 거느린 잡목림 지대에는 흰 줄무늬 조릿대가 바닥에 빈틈없이 깔렸다.

경사 급한 비탈길에 올라서면서부터는 안전한 데크길이다.

한 계단씩 차곡차곡 층계 디뎌 오르기만 하면 점점 고도는 높아진다.

스틱에 의지해 힘을 분산시켜도 갈수록 호흡 거칠어지며 헉헉 숨차다.

등에 땀이 밴다.

더워서 겉옷 벗어 배낭에 넣으며 물병 꺼내 목을 축인다.

비로소 장쾌한 암봉 드러난다.

산세는 전열 가다듬은 기마대같이 벼린 듯 예리한 창끝 곧추세웠다.

영주십경의 하나로 꼽히는 영실기암이다.

오백나한이 삐쭉빼쭉 그렇게 죽 둘러섰다.

병풍바위 깎아지른 수직 벼랑은 기개 오연하다.



변화무쌍한 고산의 기상도.

예측불허로 시시각각 변한다.

파랗던 하늘 빛깔이 어느 결에 허옇게 바랬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떼거리로 몰린다.

상태를 보아하니 농무인가 보다.

산정에서 짙은 안개 밀려들자 흐르던 땀 금세 서늘하게 식는다.

미세한 물방울의 입자가 피부에 스치니 로션을 새로 바른 듯 찹찹해진다.

줄곧 희뿌연 안개와의 동행이다.

지척 분간하기도 어렵다.

데크길에 안전 로프가 연결됐기 망정이지 안갯속에 자칫 실족사고 생기겠다.

바로 옆은 섬뜩한 낭떠러지, 부유하듯 허공에 떠다니는 느낌이다.

몽유병자처럼 스르르 안개 사이로 사라지는 사람 사람들.



해발 1500미터 표지석이 나타나면서부터 진달래가 제법 보인다.

아랫동네 진달래보다 꽃 색깔이 훨씬 진하다.

분재처럼 옹골진 화목 줄기는 억세다 못해 빳빳한 철사 같다.

적자생존, 고지대 풍상 억척스레 견딘 인고의 흔적이다.

1600 고지에 닿자 주목 군락지가 펼쳐진다.

하얗게 뼈만 남은 고사목 도처에 흔하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주목인데 백 년 능히 버팅길 듯 강골이다.

서서히 하늘이 걷히며 짙푸른 주목 새새로 언뜻 백록담 이마가 드러난다.

주목 숲을 지나자 놀랍도록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남성적인 설악이나 지리산 등 여늬 산세와 달리 안온하게 포용해 들이는 편안함.

하냥 너그러운 어머니 품섶같이 푸근해서 한라산에 설문대하르망 전설이 생긴 모양이다.



영실 꼭대기 선작지왓 초원에는 조릿대와 진달래를 좌악 깔아놓았다.

고도가 높으니 기온 역시 달라서 이곳 진달래는 꽃망울 아직 딴딴하다.

오월 보름경에나 봉오리 겨우 열릴듯하다.

노루샘에서 감로수 떠마시고 윗세족은오름에 올랐으나 안개에 점령당한 터라 싱거이 내려왔다.

조망권 출중하다고 소문났지만 안개 자욱해 시야에 걸리는 풍경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백록담 이마가 드러날 즈음부터 신통하게도 새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하늘이 트이는 놀라운 전환에 감사 오직 감사!

윗세오름에 닿았을 때는 오후 1시 45분, 남벽분기점에 갈 수 있는 시간이 15분이나 지나버렸다.

점심으로 준비한 김밥을 먹으며 눈부신 햇살 덕에 느긋하게 선탠을 즐겼다.

소풍 온 듯 보물찾기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라 백록담 잘 생긴 암벽 골골을 눈으로 더듬었다.

한라산을 한번도 오르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한번만 다녀온 사람은 없다던가.

이번엔 우물쭈물하다가 오르지 못한 남벽분기점까지 다음엔 꼭 가보도록 집에서의 출발시간을 앞당기기로 했다

오월 중순 선작지왓 평원에 진달래 활짝 피면 천상의 화원 보러 오기로 작정하니 아쉽지는 않았다.

눈엽 피어나는 눈부신 신록 풍치로 미루어 늦가을 단풍 산행 얼마나 근사할지 자동으로 부추겨진다.

겨울 설산 등반은 사라오름으로 만족했는데 올겨울 영실을 기약해 볼 자신감도 생기더라는.

그렇게 한 발짝씩 더 내딛다 보면 필경 남한 최고봉인 1,947m까지 올라설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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