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 심고 싶었어요

by 무량화

미션 산책을 다니면서 특별하게 여겨졌던 점은 캘리포니아 전역에 후추나무가 지천이더라는 거였습니다.

심지어 LA 시내 실마라는 동네엔 철도 역사 주변 가로수가 전부 다 후추나무더라고요.

미션 후원에는 거의가 고목인 후추나무. 포도나무, 올리브나무, 무화과나 오렌지나무 등이 가꿔져 있고요.

해서, 캘리포니아 최초의 후추나무가 있는 미션을 전에 소개하기도 했지요.

1830년 페루에서 온 선원이 준 씨를 미션들에 심은 것이 시초였다 하네요.


따라서 캘리 후추나무는 다 그 후손들이랍니다.



후추나무를 처음 구경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요.


그때 내심 무척이나 흥분이 되었지요.

유니언 역사 앞 올베라 거리 중심의 기괴스럽게 용트림한 노거수가 바로 후추나무임을 지인이 귀띔해 주기 전까지, 후추나무는 덩굴식물인 줄만 알았어요.

왜냐하면 위키백과가 설명해 준 바로는 후추나무 원산지는 인도로, 잎은 달걀 모양으로 서로 덩굴졌다고 했거든요.

반면 다음 백과는 아메리카에서 재배되는 옻나무과에 속하는 관상용 소교목을 보여주며 후추나무 잎은 길고 가늘다고 했고요.

헷갈리던 차 실물을 통해 캘리포니아 후추나무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신명이 날밖에요.

다만 캘리포니아 후추나무는 이름만 후추나무(pepper tree) 일 따름, 딸내미의 첨언에 따르자면 먹는 후추와는 전혀 별개의 다른 수종이라는군요.

먹는 후추나무는 학명이 Piper nigrum, 후추과의 나무이고요, 캘리포니아 후추나무는 옻나무 과라네요.



미션을 찾아 '왕의 길'을 따라 북상하면서 캘리포니아 도처에서 후추나무를 흔하게 만났어요.

사막기후대에서도 적응이 잘 되는 듯 도로변 가로수로 울창히 숲을 이룬 후추나무들.

농장 지대에는 아예 울타리 삼아 밭둑에 죽 심어져 있었고요.

상록 교목으로 수형도 특이하게 생겼지만 무엇보다 주렴처럼 드리워진 잎 모양이 아스파라거스처럼 시원해 보이더군요.

아네스 미션에서 나무를 자세히 관찰해 보니 붉은 열매가 익어가는 한쪽에선 신기하게도 꽃이 하얗게 피어있었지요.

잎을 비비자 싸한 내음이 퍼졌으나, 떨어진 열매를 주워 쪼개봐도 맵싸한 향은 나지 않더라고요.



기원전 10세기경 솔로몬을 방문한 스바 여왕이 금은보석과 향신료를 선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는데요.

이처럼 진작부터 약용식물로서의 향료들은 신에게 봉헌물로 바치거나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데 이용되는 귀물이었다지요.

실제 흑사병이 창궐할 때는 향신료의 향기가 병을 쫓는다 하여 다른 향신료와 더불어 값이 급등했다네요.

후추가 항균작용을 해 유럽에서는 육고기 저장 시 응용됐고요.

이후에도 역시 방부 효과를 활용해 햄과 소시지 만들 때도 0.2~0.5%씩을 첨가했고요.

중세 시대 기사나 영주들은 동방에서 수입된 향신료를 불로장수의 명약이라 믿어 금은보다도 비싼 값으로 거래했답니다.

당시 음식에 후추를 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캐비어를 요리 접시에 듬뿍 담는 것과 같았겠더라고요.



이것 때문에 전쟁도 불사했고 베네치아를 거대한 도시로 만들었으며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찾아 나서게 만든 향신료 후추.

명나라의 탐험가였던 정화는 서양과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함대를 이끌고 먼저 세상을 두루두루 누볐지요.

허나 아프리카까지 돌았지만 마땅한 교역 거리가 없어 대항해는 싱겁게 막을 내리고 말았는데요. 물론 나라 형편도 달라졌고요.

반면 육류를 즐긴 서양 사람들은 그들 식의 음식문화에 따라 향신료에 대한 욕구도 강했더랬지요.

해서 그런 희귀 향료를 손에 넣기 위해 유럽인들은 목숨 걸고 탐험에 나선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답니다.

소금이나 후추가 금보다 훨씬 고가이던 시절 얘기이지요.



후추 효능의 첫째는 음식의 부패를 막는 것이고 둘째는 풍미를 더 좋게 하는 것이지요.

상한 음식의 맛과 냄새를 감추기 위해 후추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실제 후추는 고기의 누린내와 생선 비린내를 없애주고 기생충을 제거하며 동맥경화 등 순환기 계통 질병 치료에 탁월하대요.

상쾌한 향미가 식욕을 증진시키기는 하지만 주의할 점도 있어요.

많이 섭취하면 위 점막을 자극해서 충혈이나 염증을 일으키므로 조심해야 한다네요.

식물이 내는 방향성분은 움직일 수 없는 제 스스로를 보호 방어하기 위해 분비하는 매우 강력한 천연 살충제이니까요.



기후대가 특수해 아무 나무나 심을 수 없는 동네인지라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LA에서는 그리도 왕성하게 잘 자라는 부겐베리아나 재스민이 영하로 푹 내려가는 여기선 못 자라거든요.

올리브나무를 심은 집은 더러 있지만 후추나무는 아직 본 적이 없는 이곳.

봄이 오면 묘목 파는 집에 가서 문의해 봐야겠어요

가능하다면 사철 푸른 주렴처럼 살랑살랑 드리우는, 천안삼거리 능수버들같이 잘 생긴 후추나무 한 그루 뜰에다 심고 싶거든요. 2015



*그로부터 십 년 후 겨울, 몇 해를 코로나로 묶였다가 미국에 가서 딸내미네 새집을 방문했지요. 부겐벨리아 생울타리로 둘러싸인 너른 안뜰에서 노거수 후추나무를 만났어요. 드라이브웨이에서부터 눈에 확 드는 후추나무. 어찌나 반갑던지요. 무엇이든 마음으로 원하면 이루어진 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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