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차분히 내리던 어제 오후, TV문학관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를 보았다. 보면서 거푸 눈물을 닦았다. 선한 사람들의 삶에는 평화를 좀 허락해 주시지, 왜 그리 자꾸 아픈 그늘이 드리울까 안쓰러웠다. 동네아이들 놀림감으로 살았지만 사람의 도리를 말없이 지키고 행한 주인공이 누선을 자극, 모처럼 안구정화를 시켜주었다. 잔잔한 감동이 상기도 여운으로 남아 그의 기억은 길고도 오래 애틋한 연민으로 새겨질 것이다.
언젠가 강론 중에 들은 감동적인 얘기가 떠올랐다. 동해 어느 유원지에서 사철 변함없이 자그마한 좌판을 펴고 장사를 하는 장애인 이름은 베드로. 장애인이기 때문에 구청의 배려하에 그 자리 나마 잃지 않고 줄곧 장사를 하며 몇 푼 수입을 얻어 아내와 살고 있는 그였다. 헌데 정작 장애인이 아닌 정상의 그 아내는 놀고먹는데 그냥 살림이나 알뜰히 하며 곱게 산다면 무슨 문제랴. 이 여편네는 남편이 힘겹게 벌어온 돈이 좀 모였다 싶으면 그 돈을 몽땅 들고 가출, 아니 튀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외지로 나돌며 실컷 자유부인 노릇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시금 집이라고 남편곁으로 기어든다고 한다. 남편은 그런 아내임에도 번번 말없이 수용해 들이고.
장애인인 베드로를 성당으로 인도해 영세를 준 신부님은 베드로의 영적인 아버지. 그 신부님이 그녀의 잦은 가출 소식을 서울에서 듣고는 괘씸히 여기던 중, 다시 그녀가 돌아왔다는 얘길 전해 들은 즉시 밤차를 타고 동해로 내려갔다. 이른 아침 집으로 찾아가니 여자 혼자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방에 누워있고 베드로는 벌써 장사하러 나가고 없더란다. 그래도 인간인지라 신부님의 불시방문을 받은 여자는 몸 둘 바를 모르며 쩔쩔매다가 남편에게로 신부님을 안내하고는 아침준비 한다며 돌아서려는데...
신부님의 일갈, 더 이상 이러고 살질 말고 이참에 아예 갈라서라! 도대체 한두 번도 아니고 이게 벌써 몇 번째냐! 둘에게 호통을 치자 베드로가 이러더란다. 신부님, 몇 번째라니요. 여지껏의 일은 다 용서했으니 이번이 처음이지요. 천주교에서는 어느 종교에서보다 이혼을 금한다. 그럼에도 이혼하라고까지 해야만 했던 신부님. 그러나 베드로의 대답에 몇십 년 사제생활을 한 자신이 장애인 베드로의 끝없이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 앞에 부끄러웠다고.... 일곱 번 용서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으니.
90년대부터 한국 소설계를 이끌어 온 작가 이순원. 이름 때문인지 소나기의 황순원, 배경 때문인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TV문학관을 보면서 얼핏 오버랩되기도 했다. 이순원의 단편인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는 상처진 마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으며 위로해 주었다. 과연 그랬다. 아리고 저릿거리던 가슴 한켠에 따순 물살 찰랑이게 했다. 1988년 <낮달>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래, 이순원은 왕성한 창작력으로 소설계를 평정해 왔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로 천민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그. <수색, 어머니 가슴속으로 흐르는 무늬>로 동인문학상, <은비령>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그의 소설을 다음번 LA에 나가면 구해 읽어봐야겠다. 작가가 묘사해 놓은 장애인 세일이 아재 그리고 사대육신은 멀쩡하나 정신이 불구였던 그의 노름꾼 외사촌. 확연히도 대비되던 두 사람과 마음씀 후덕했던 당숙을 글로 만나보고 싶어서다.
안타까울 정도로 가여운 주인공은 가진 것 없는 데다 약하고 외로운 사람이다. 오른쪽 팔 하나만 정상일뿐 나머지 팔다리가 온전치 않을뿐더러 지능도 낮다. 고아인 그를 당숙이 거두어 사람구실하며 살아가게끔 보살펴준다. 매 끼니 먹고살기조차 어렵던 그 시절. 들여준 여자는 베드로 마누라 같이 헤픈 여자, 주인공을 등쳐먹고 뺑덕어멈처럼 사라진다. 소몰이꾼으로 살아가며 두 번째 맞은 착한 여자마저 굴곡진 인생의 피해자. 끝까지 신산스러운 주인공의 일평생이 내내 짠하기만 했다. 그가 마침내 걸음을 멈춘 날, 한 줌 재되어 깃털보다 가벼운 육신이 대관령 바람 타고 하얗게 흩날릴 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시간 반 동안, 대부분이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 옛날 풍경들이지만 그래도 문득문득 그리웠다면 감정의 사치가 심한 걸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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