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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09. 2024

서원의 효시 소수서원

모국 방문 계획이 있으시다면

오래전 유럽여행을 하며 하이델베르그에 들렀었다오. 그때 아찔할 정도로 문화충격이라는 걸 강하게 받았소이다. 왜 아니겠소이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1386년도에 세운 대학으로 독일 대학의 기원이 된 하이델베르그 대학이야말로 그만큼 인상적이었고 감명도 깊었던 거라오. 독일 문화와 사상에 지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게 한 독일 정신의 요람이 된 대학. 유서 깊은 하이델베르그 대학 곳곳을 구경하며 내심 얼마나 감탄했던지 모른다오. 세상에나... 1386년대라면 여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있기 직전인 난세의 고려 말이었소이다.

저마다 관심사나 취향은 각자 다르외다. 따라서 역사에 흥미있는 일부에 국한된 얘기일 수도 있겠소이다만. 혹 모국 방문 시 가장 한국적이며 동시에 자긍심 느낄만한 여행지 추천하라면 주저치 않고 권하고 싶은 곳이 영주 소수서원올시다. 괄목할만한 발전상 눈이 부신, 낯설어진  도회의 빌딩 숲 아래 어줍잖은 먹방과 성형미인이 활개치는 이상한 세태이긴 하더이다. 또한 빛이 강한만치 그늘도 짙어 폐지 줍는 노인네 남루한 살림에, 쪽방촌 허름한 형편도 공존하는 한국이었소이다. 그 점 참작하되 특별목적의 테마여행이 아닌, 이를테면 일반 관광을 원할 경우에 추천할만 한 곳. 한국적 정서가 연면히 흐르면서 뿌듯하고도 자랑스러운 느낌이 드는 데가 소수서원 아닐까 싶소이다. 더구나 무량수전이 있는 부석사도 가깝더이다. 모국 방문을 염두에 둔 교민이라면 한 번은 꼭 찾아보시라고 권할만 하외다. 아까운 시간 버렸다는 후회 절대로 하지 않으실 거라 여겨집니다.

한반도 내륙 깊숙이 자리한 영주 소수서원을 찾은 날은 만추. 양광 따사로이 내리는 시월이었다오. 조촐한 향교 같은 분위기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예전 모습 그대로라는 소수서원은 그 자체 규모만도 대단하였소. 낙동강 원류가 되는 맑은 죽계천 둘러싸고 소수 박물관, 선비촌, 저잣거리, 한국선비문화수련원 등이 둘레둘레 부락을 이루었더이다. 성균관 버금가는 민족교육의 산실인 사적 제55호 소수서원을 비롯, 한 장소에 여러 종류의 귀한 볼거리가 이리 운집해 있는 경우란 흔치가 않기에 하루 종일 눈과 귀도 호사를 했다오.


기상 늠름한 적송들이 아름차게 늘어선 '학자 수림'을 지나 제일 먼저 '경렴정'이란 소박한 정자를 만났소이다. 계류 소리 더불어 벗하는 이 정자는 1543년 주세붕 선생이 서원 담밖에 지은 무척 오래된 정자였다오. 단청 입히지 않은 담담함이 오히려 운치 더하는 이 정자에서는 당시 시를 읊으며 학사들끼리 풍류를 즐겼다 하외다. 천정에는 당대 학자들 글씨가 든 현판 즐비하고 기둥마다 일필휘지 주련이 정자의 품격을 더하였소. 발음도 어려운 경렴당이란 이름은 안향 선생을 높이는 뜻에서 '경'자를 붙였고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를 추모하는 뜻에서 '렴'자를 땄다 하더이다.


영주 소수서원은 주세붕이 1543년 8월 11일 설립했으며, 1548년 10월 이황이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곳이라오. 주세붕은 조선 초에 대사성 등을 역임한 분이자 청백리로 뽑힐 만큼 인품 깨끗한 문신이었소. 그는 목민에 힘쓰며 유교적 윤리 교육을 통해 기강 바른 인격체를 육성하고자 했던 교육자이기도 하였소이다.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사 년의 임기 동안 안향 사당을 건립하는 공사를 필두로,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데서 소수서원은 비롯되었다오. 그가 우러른 안향은 고려에 주자학을 도입해 널리 펼친 성리학자로 조선시대 유학자 모두의 대스승이었소이다. 이에 주세붕은 안향이 어릴 적 수학했던 옛 사찰인 숙수사 빈터에 사당을 지어 제향하고, 나라의 동량이 될 후학을 양성하고자 서원을 지었다 하외다. 하여 서원 입구 송림에 절터임을 나타내는 한 쌍의 숙주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우뚝 서있더이다.


소수서원은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은 편액을 내려준 사액서원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오. 사액서원은 조정으로부터 책, 토지, 노비 등이 주어지는 데다 세금, 병역까지 면제해 준다 하더이다.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 (旣廢之學紹而修之)"란 문구에서 취한 '소수(紹修)'로 이름 짓고, 1550년 2월에 '소수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명종 임금이 내렸다 하오. 곧,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 시 조정에 건의해 최초로 받게 된 사액서원이자 최초로 공인된 사립교육기관이라 하더이다. 해서 경내에는 강의를 하던 강학당(보물 제1403호), 서책을 보관하는 장서각, 스승이 기거하던 직방재와 일신재, 사부의 그림자 피해 뒷물림해 지은 학생들 거처인 학구재와 지락재 등 조촐하면서도 단아한 건물들이 이마 맞대고 있더이다. 서원을 둘러보며 뿌듯했던 것은, 비록 하이델베르그 대학보다 일 이백 년 늦었을지라도 우리나라에 이만한 교육기관이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흉금이 펴지는 기분이었소.


4천여 유림들을 배출해 냈다는 소수서원. 교육기관이라면 서당이 고작이던 지방에 각지의 재능 있는 인재 모아 훌륭한 유학자로 기르고자 세운 서원이라오. 혹자는 유학이 조선을 멍들게 한 분당 정치의 산실이라고 몰아세우나 사색당파 싸움질이 사림의 탓만이오리까. 풍양 조씨, 안동 김씨, 여흥민씨 등의 세도정치가 터를 잡은 조선 후기 들며 무능한 왕일수록 외척들에 휘둘리거나 권신들 농간 발호하며 정쟁에 휩쓸려 든 것을... 또한 지금도 걸핏하면 냄비처럼 달아올라 끼리끼리 갑론을박 치고받는 국민성이 문제일지도 모를 일이외다. 서원에서는 인격 고매한 학자뿐 아니라 나라가 국난에 빠졌을 때 앞장서 구한 선비 출신 의병장 다수를 배출하기도 했다오.


대원군이 전국의 많은 서원을 철폐하던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 중 하나가 소수서원이었다 하오. 서원엔 공부하다 머리 식힐 겸 거닐만한 정원과 연못도 있고 발치를 휘도는 죽계천 건너에는 산기슭 따라 오솔길이 나있어서 사색하기 알맞겠더이다. 산책로 옆 정취 넘치는 풍광 속에 '취한대'란 누각 강물에 얼비치고, 백운동 경자 바위는 물에 잠길락 말락 하며 공경할 경(敬) 붉은 글자를 보여주었더랬소.

           (현존하는 敬 자가 새겨진 바위)


소수서원을 둘러본 다음 소수박물관으로  올라갔더이다. 유교 종합박물관에 다름 아닌 그곳엔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이끈 성리학과 관련된 전통문화유산이 체계적으로 전시돼 있었소. 퇴계 이황이 선조 임금 모쪼록 성군되기를 바라며 올린 '성학십도' 판목과 역대 명문가의 글씨를 모아 탁본한 책,  안향 초상화, 주세붕 초상화, 교재로 썼던 서책 등 진귀한 자료 다수를 소장했더이다. 그밖에 석기시대 고인돌에서 신라시대 불상이며 근세 유적에 이르기까지 영주의 소중한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어 있었소. 또한 탁본을 손수 떠볼 수 있도록 배려한 체험공간에는 먹물과 한지가 마련돼 있기에 여정의 막간, 잠시 손에 먹물도 묻혀보았더이다.


박물관을 나와 찾아간 곳은 선비촌이었소. 탐스러운 맨드라미 붉고 코스모스 갈바람에 하늘대는 고샅길 따라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터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오. 중앙 관직에 올라 입신양명을 한 솟을대문의 대감마님댁도 있었소. 인의예지를 실천하며 수신제가 하는 올곧은 선비님 댁도 있는 반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청빈한 생을 살았던 샌님 네 초가집도 있더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양반 댁 대문간 옆에는 가마도 떡 버티고 있었소. 이를테면 자가용까지 거느린 위풍당당한 대갓댁이었던 모양이오. 이제는 전설이 된 성황당, 상여집, 대나무가 꽂혀있는 당집은 마을 뒤편 후미진 데 슬쩍 숨어있더이다. 민속촌에나 가야 구경하는 연자방아, 구유통, 장독대, 대문에 붙어있는 입춘대길에서 문득 외갓집 사당 '충장사'가 있는 대호지 풍경이 떠올라 한참을 멈춰 섰다 왔다오. 긴 세월의 뒤안길 돌아 편안한 나이에 이르른 작금, 누구라도 어릴 적 기억 한자락 건져보고 싶다면 주저 없이 다녀올만한 소수서원입디다.

*주소: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자동차로 서울서 2시간 반/부산권은 세 시간 정도 소요

*열차는 청량리에서 2시간 40분/부산 부전역에서 4시간 1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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