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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30. 2024

평생을 맘 졸인 평사리 내당 마님 윤씨부인

남도 기행 4

지리산 남부 능선의 끄트머리 형제봉 아래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지는 악양면 평사리.

너른 악양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최 참판 댁.

그 댁은 손이 귀한 집안으로 허약한 아들과 손녀가 있을 뿐이다.

만석꾼 최 참판 댁 내당 마님인 윤씨 부인은 청상과부다.

이마가 시원하고 눈이 깊어 강인하고 기품 있는 인상이다.

엄하고 까탈스러운 사랑채 당주인 최치수는 아내인 곱디고운 별당아씨와의 사이에 서희를 둔다.

하지만 별당아씨는 떠돌이로 머슴살이하러 들어온 구천과 눈이 맞는다.

이들이 야반도주하는데 윤씨 부인이 적극 돕는다.

기실 명석하나 말수 적은 구천과의 관계는 천륜인 모자지간.

윤씨가 불공드리러 갔다가 동학당 남자로부터 겁탈 당해 낳은 아들이라는 숨겨진 사연이 있다.

최치수도 어렴풋 비밀스러운 내막을 눈치챈 터.

포수를 대동하고 그들 뒤를 쫓아 산속을 뒤지다 사고가 생겨 최치수는 잠시 집에 돌아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최치수는 재산을 노린 자의 계략에 말려 삼끈으로 교살 당해 비명에 가게 된다.

당주가 사라지고 윤씨 부인마저 호열자로 세상을 뜨자 무주공산이 돼버린 참판댁.

집안 친척인 조준구가 서울에서 내려와 최참판댁 살림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기 시작한다.  

만석꾼 재산을 게걸스럽게 취하던 조준구는 소작농을 괴롭히며 친일행각까지 일삼는다.

소작료 올려대며 횡포 거듭하는 그를 성난 민심이 심판하고자 집으로 쳐들어 오나 잽싸게 숨어 용케 목숨 부지하는 조준구.

염치없기가 끝이 없는 임이네 모자를 거두던 착하기만 한 월선네.

그녀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용이, 마침내 돌아왔나 싶은데 서희 아씨를 데리고 길상과 간도로 떠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주도면밀하게 움직여 간도로 떠난 그들 삶은 어떻게 전개되어 갈지.....

여기까지가 평사리를 무대로 한 소설 <토지> 1부 5권에 해당된다.

바로 그 무대가 여기 펼쳐져 있다.

 


최참판댁 안뜰에 봄 햇살 따스히 내린 오후, 천천히 내당과 별당을 둘러봤다.

규모 큰 살림 형편을 가늠하게 하는 엄청 커다란 우물이 먼저 눈에 띈다.

여러 고방이며 즐비한 장독대, 절구통과 멍석, 농기구 가재도구들이 만석꾼 살림살이답다.    

소설 속 최참판댁 배경을 그대로 재현시켜 놓은 여러 동의 기와 채 한옥.

칸칸이 들어선 방과 너른 마당이 실제 사람이 살았던 집처럼 느껴진다.

최참판댁 안주인이자 서희 조모 윤씨 부인이 거처하는 공간인 안채.

전통양식대로 별당과 사랑채와도 담을 사이에 두고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들머리 외양간을 지나 행랑채 부엌 돌아서면 정갈하게 꾸며진 안채가 나온다.

반들거리는 장롱과 문갑이 놓인 방안 한켠에 물레와 바구니 속 실 꾸러미가 잘 정돈돼 있다.

부리는 식솔들 손길 바지런히 놀려 매매 쓸고 닦고 매만진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무렇게나 걸어둔 듯한 시래기며 옥수수 종자와 목화 마른 단은 훌륭한 소품 구실을 한다.    

그에 반해 뒤꼍 담장 아래 꽃 흐드러진 겹동백 두 그루.

곱다기보다 탐욕스러운 조준구와 그 아내 아니면 임이네의 덕지덕지 늘어진 욕심보처럼 추해 보인다.

토종 동백인 홑동백 오연하고 단아한 자태란 어쩌면 부 축적에 따르기 마련인 만석꾼 내력과는 안 어울려서일까.

별당채 담장에 시들어가는 서향나무꽃은 그 옆에 심어진 화살나무 연둣빛에 주눅 들어한다.

왜 화살나무를 별당 옆에 심었을까.

짐작해 보니 붉은 단풍빛 고와서라기보다 아기씨 지키라는 화살나무가 아니겠나 싶어 진다.

윤씨 부인이 거처하는 안채에서는 앵두나무와 매실나무만 보일 뿐이다.

따로 후원도 조성해놓지 않았음은 안방마님 성품 따라서 그러한지 모르겠다.

그곳 안주인이던 윤씨 부인은 스물 초반에 남편을 갑작스레 잃었다.

단지 병약한 아들 하나를 두고 만석꾼 안살림을 손수 꾸려나가야 했던 윤씨 부인이다.

숱한 아랫사람 거느리고 대소사 주관해 나가던 대차고 위엄 어린 그녀였다.

허나 홀로 그 모든 일 처리해 나가며 겪어냈던 어려움 오죽했으랴.

와중에 겁탈 당해 불의한 자녀를 몰래 낳으므로 비밀을 묻은 어미로서 열두 살 아들과는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고 만다.

게다가 며느리가 근본 없이 떠돌던 머슴 구천과 정분이 난다.

윤 씨 부인은 야밤을 틈타 두 사람을 조용히 안전한 곳으로 떠나보낸다.

그녀가 거둔 머슴 구천은 바로 비밀리에 낳은 자신의 아들.

결국 이복형제간에 한 여인을 두고 살인이 날 판이었으니 어쩌겠는가.

고뇌 어린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던 그녀의 복잡한 심사야 뉘라서 헤아릴까.

뼈아픈 고통을 뉘 있어 더불어 나눌 수 있으랴.

불행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재산을 노리는 자들의 계략으로 아들 치수가 비명횡사를 당하게 된다.

자식 잃은 슬픔은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같다 하여 단장지애(斷腸之哀)라 한다.

졸지에 아들을 떠나보낸 어미는 이미 창자가 마디마디 끊겼을 터다.

얼마 후 마을에 호된 돌림병이 돌자 윤씨 부인마저 호열자에 걸려 눈을 감는다.

최참판댁 아기씨 서희는 나이에 비해 당차고 똑똑한 아이.

하지만 험한 세상에 홀로 남겨질 어린 손녀를 애닳게 바라보는 그녀 심정이야....   

"내 나이 어리다고, 내 처지가 적막강산이라고 지금은 나를 얕잡아보지만 어디 두고 보아라."

도도하게 입 앙다무는 서희가 순간 얼핏 스쳐 지났다.

환영이리라.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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